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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18일(수) ㅣ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3>-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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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1 04:55:03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옷값 받으러 온 양장점 늑대 사장-대학생 때 급성 맹장으로 쓰러져
 
삽화 이태형 화가

무작정 K시로 왔지만 정말 갈 곳이 없었다. 학창 시절의 몇몇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지만 차마 그들을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또 그들에게 내 곤궁한 처지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남의 불행에 동정하는 체 하지만 그것은 결국 가십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원해서 온 인생은 아니지만 살아있는 한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만일 내가 지금 죽어버리면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할까. 딸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할까, 불효막심하다고 하실까. 그렇게 해서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을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 아버지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죽고 싶은 것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살고 싶은 욕망이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킬리만자로의 산정 높이 올라가 우뚝 서는 표범처럼 나를 위해서 서야 하고 나를 위해서 죽어야 했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한테 복수하는 것이었다.

당분간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차라리 친구보다는 내 치부를 보여도 자존심 상하지 않는 사람이 나았다. 전에 본 적이 있는 오빠 친구의 애인을 찾아가 며칠 의탁을 부탁했다. 그리고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결심을 다지고 또 다졌다. 고등학교 시절 남달리 나를 아껴주던 영어 선생님을 찾아가 입주 가정교사 자리를 부탁했다. 선생님한테 절박한 사정을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영어 선생님은 내가 매달릴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재학시절 영어를 꽤 잘했던 나를 선생님은 각별히 아껴주셨다. 선생님 소개로 며칠 후 그곳의 큰 방직회사 사장님 댁에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우선 숙식이 해결돼 살 것 같았다.

그 집에 입주한 몇 개월 후 나는 사장님께 염치 불구하고 낮에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취직을 부탁했다. 다행히 그분의 배려로 방직회사 경비실에서 낮 근무를 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자 나는 서서히 대학입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 재학시절 그렇게 열망하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시골에 묻혔을 때의 좌절감이 뭉클 생각나 여기까지 온 것이 꿈만 같았다. 다음 해 봄 마침내 나는 꿈에도 그리던 대학생이 되었다. 자그마치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삼년 반이 지난 뒤였다. 눈물로 건넜던 드들 강을 함박웃음을 안고 돌아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 어머니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딸 자랑을 해댔다.

그러나 나의 대학생활은 생각같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았다. 늘 시간에 쫓기고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없었고 대학 미팅에 한 번 참석할 기회조차 없었다. 생활비, 학비, 기타 잡비 등을 벌기 위해 무리한 과외를 해 몸은 더 말라갔고 마음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어느 날 마당에서 누군가가 "계세요" 하고 나를 찾았다. 무심히 방문을 열었다. 어떤 중년 남자가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흠, 결국 잡았군. 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 남자는 거드름을 피우며 나를 노려보았다. "나, XX 방직 공장 옆 사넬 양장점 주인 정 사장이요" 하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아, 네, 안녕하세요." 나는 그 남자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전에 방직 공장에서 낮 근무를 할 때 사넬 양장점에서 두 벌의 옷을 월부로 맞춰 입었다. 나뿐 아니라 그 방직 공장의 많은 여공들이 사넬 양장점에서 옷을 맞춰 입고 월부로 갚아나가곤 했다. 한 벌 값은 다 갚았으나 두 번째 옷의 잔금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대학 등록금을 내고 책을 사고 방을 얻고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저축했던 돈은 다 써버리고 그나마 과외에서 들어오는 수입은 매달 생활하기에도 부족했다. 자연히 월부금 옷값이 밀리고 말았다.

그는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어둠침침한 내 자취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왜? 이렇게 숨어버리면 내가 못 찾을 줄 알았나, 어디서 해 먹던 못된 짓이야?" 그는 대뜸 나를 남의 돈이나 떼어먹는 불량자로 몰아붙였다. "숨으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그러니 조금만 참아주시면 꼭 갚겠습니다." 나는 울상이 되어 두 손을 비비며 용서를 빌었다.

"언제 갚겠다는 거야?" 내 몰골이 불쌍했는지 그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형편 되는 대로 조금씩 갚을게요." 나는 죄송해 얼굴을 들지 못한 채 또 손을 비볐다. "내가 꼭 돈을 받으려고 온 것은 아니야. 자네 하기에 따라서는 내가 도움이 돼 줄 수도 있어. 알겠나?" 그러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나를 자기 앞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깜짝 놀라 밀치자 그는 오히려 나를 넘어뜨리고 점점 압박을 해왔다. 나는 밑에 깔려 빠져나오려 몸살을 치다 그의 어깨를 꽉 물어뜯었다. 그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나는 그 틈을 타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런 망할 년, 감히 나를 물어." 그는 살기등등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내가 엉엉 큰소리로 울기 시작하자, 당장 자기 돈을 갚으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대문을 꽝 닫고 가버렸다.

나쁜 놈, 나뿐 아니라 다른 공장 아가씨들한테도 틀림없이 저런 파렴치한 짓을 했을 것이다. 많은 공장 아가씨들이 유린당했을지도 몰랐다. 이따위 수치스러운 얘기를 아무한테나 할 수 없듯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언제 또 그 엉큼한 늑대 같은 정 사장이 쳐들어올지 몰라 나는 어머니를 지겹게 졸라 빚을 얻어 나머지 옷값을 모두 갚았다.

대학 2학년 봄 학기였다. 심한 과로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나는 학교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바로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급성 맹장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수술비가 없었다. 그렇게 목마르게 원하던 성공은 고사하고 병든 몸으로 아버지 앞에 설 판이었다. 아버지는 애초부터 내가 대학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내가 아프다 한들 도와주리란 기대는 애초에 할 수 없었다. 아니 하지도 않았다. 이 사실을 알면 어머니만 가슴을 태우며 발을 동동 구를 것이었다. 설사 수술비가 없어 죽는다 해도 결코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지 않기로 나는 결심을 굳혔다.

그때 구원의 밧줄이 엉뚱한 곳에서 내려왔다. 대학병원의 외과 과장님이 딱한 사정을 의대생 제자들한테서 듣고 무료로 수술을 해주기로 하셨다. 당시 의대생 반장 석현 씨와 내 친구 수현은 연애 중이었다. 징검다리를 놔 준 사람이 바로 나였다. 제자들을 남달리 사랑하시는 과장님은 제자들의 친구까지도 외면하지 못하셨던 것이다. 나는 과장님의 부인이 운영하는 개인병원으로 옮겨져 의대생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술을 받았다. 수술이 끝난 뒤 부랴부랴 달려온 어머니가 원장님께 최소한의 약값만을 지불했다.

사경을 헤매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내가 과장님 부부의 지극한 '히포크라테스 의사 정신'이 아니었다면 과연 살아날 수 있었을까. 뭐라고 감사의 말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또 나를 위한 의대생 친구들의 한결같은 우정과 내 친구 수현의 남다른 보살핌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죄 없는 친구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준 나는 얼마나 염치가 없었는지. 나는 긴 세월 동안 다시 한 번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인간이란 얼마나 이기적이며 편리한 존재인지, 필요할 때 찾고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망각해 버린다.

<3월 28일 자는 논픽션 부문 우수상 수상작인 임지나 씨의 '걸어온 발자국, 그리고 걸어갈 발자국 ④'가 게재됩니다.>

임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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