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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골목길 도시다] <3> 간판 자국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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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2 04:55:06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1993년부터 정권 바뀔 때마다 간판도 새로 내걸었던 동성로 '제크'
 
은하비디오 간판
 
제크 ‘간판 디자인’ 이력 간판. 정권마다 간판을 교체했다는 사실과 정권별 대통령 캐리커처가 웃음을 짓게 만든다. (대구 동성로)
 
경신방염공사 간판 (대구 북성로)
대구의 골목길에서 촬영돼 2015년 공개된 영화가 있다. ‘은하비디오’(감독 김현정)다. 비디오 대여점이 멸종하던 시기, 은하비디오를 운영하는 은하(김예은 분)는 가게 폐업을 준비한다. 은하는 옛 연인과의 추억이 담긴 영화 ‘킬리만자로’ 비디오를 보다가 연체한 비디오테이프를 반납해 달라는 구실로 그에게 연락을 한다. 옛 연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전화가 오기만을 밤낮으로 기다리지만, 끝내 연락은 오지 않는다. 은하는 간판을 내리고 가게를 비운 후 이삿짐을 실은 트럭에 몸을 싣는다.

◆사랑은 추억을 남기고 간판은 자국을 남기고

비디오 대여점의 공기, 냄새, 질감, 풍경, 소리 등 ‘아날로그’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영화다. 남녀의 아픈 이별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간판 자국’ 기사 취재를 하며 봤기에 더욱 슬프게 느껴진 부분은 은하비디오 간판을 철거하는 장면이었다.

한 가게가 생명을 다한 것이다. 가로등이 ‘커버’하지 못하는 공간을 대신 환하게 비춰주던 간판 불빛이 사라져버려 골목의 밤은 더욱 적막해질 것이다. 미처 소식을 듣지 못하고 찾아온 손님들은 크든 작든 ‘쎄한’ 아쉬움을 느끼며 그 찰나 마치 조문을 하고 나서듯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간판을 내리자 그 뒤에 나타난, 이전에 있었던 가게의 간판 자국이다.(영화를 보면 ‘탑비디오’라는 간판 자국이 나온다) 인간 누구나 죽음을 겪듯이, 어느 가게든 폐업이라는 마지막을 겪고, 그것들이 쌓이며 지속되는 것이 인간 문명이다.

이 영화는 대구 중앙로 향촌문화관에 가면 관람할 수 있다. 러닝타임은 부담 없이 보기 좋은 20분. 영화 후반부에 향촌동`포정동의 촬영 당시 풍경이 살짝 등장해 반갑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전임에도 지금과 모습이 좀 다르다. 없어진 가게도 있고 새로 생긴 가게도 있고 바뀐 간판들도 목격된다. 골목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태계니까.

◆간판은 어떻게 사는가

골목 생태계의 구성원인 간판에도 사람처럼 삶이란 게 있을 것이고, 그 삶에는 저마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에 힌트를 준 작품이 하나 있다.

한국 최초의 북디자이너이자 글꼴(서체)을 디자인하는 타이포그래퍼 정병규가 2003년에 발표한 포스터 작품 ‘문자는 어떻게 사는가’다. 골목의 이런저런 간판 사진을 샘플로 가져와 콜라주 기법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작품 설명은 이렇다. ‘길거리에 넘쳐나는 문자, 서로 관계없는 문자가 모여 웅성거리며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내려 한다.’

정병규가 던진 ‘문자는 어떻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간판은 어떻게 사는가’로 변주해 그에 대한 답을 대구의 골목길에서 찾아봤다.

북성로 ‘경신방염공사’는 흔히 볼 수 있는 플렉스 소재 가로형 간판 말고도 그보다 더 오래된 나무 소재 세로형 간판(경신방염‘소방’공사라고 적혀 있다)도 갖고 있다. 두 간판을 합쳐야 이 가게의 역사를 제대로 셈할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어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이창호 사장은 “나무 간판은 40여 년 전 아버지께서 개업하시고 얼마 안 돼 단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낡았지만 버리지 않고 그대로 가게 앞에 세워 뒀다”고 설명했다.

교동 ‘태창복장사’도 2개의 간판을 갖고 있다. 둘 다 37년 전 김태식(교동시장활성화구역상인회 부회장) 사장이 개업할 때 인근 간판 가게에 주문해 단 것이다. 45년 전 교동으로 와 남의 가게 직원으로 일하다 자기 가게를 처음 갖게 됐을 때 내건 잊지 못할 간판이다. 김 씨는 “당시 태창메리야스는 품질 좋은 의류 제품으로 통했다. 그 의미를 가게 이름에 빌려왔다”며 “손님들이 멀리서도 보고 오라고 간판을 2층에도 단 것”이라고 했다. 김 씨를 위해 평생 홍보 업무에 투신한 저 간판은 이제 늙어서 그런지 그동안 쬔 햇볕 때문인지, 글씨 두 자가 색이 바래버렸다.

동성로 ‘제크’는 1993년부터 지금까지 교체한 5개의 간판 디자인, 해당 시기 대통령 5인(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의 캐리커처, 가게 모습을 담은 사진을 표시한 간판을 따로 만들어 가게 밖에 걸어 놓았다. 간판 자국 이력서인 셈이다. 곧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또 어떤 간판 디자인을 보여줄지 기대됐기에,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직접 물어보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이곳은 갑자기 문을 닫아버렸다. 내부 수리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폐업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간판도 미리 찍어 둔 사진으로만, 그러니까 간판 자국으로 남게 됐다.

서성로 ‘한영공업사’는 1961년 개업해 서성로 도로 동쪽 편에 있다가 지난해 서쪽 편으로 이전했다. 그러면서 간판도 교체했다. 한영공업사는 원래 간판 주위에 빙빙 돌아가는 송풍기와 환풍기 장식을 달아 이색적인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홍종배 사장은 “당시 간판 장식은 가게에서 판매하는 제품을 소재로 그저 재미로 만들어 달았던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홍 씨는 현재 자리로 가게를 옮기고서도 새 간판에 송풍기와 환풍기 모양 심벌을 박았다. 가게의 오래된 상징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간판은, 즉 ‘골목의 문자’는 이렇게 산다. 간판은 소상공인들의 실력 및 신용 보증서이고, 홍보사원이고, 개성은 물론 철학도 표현하는 도구다. 그래서 골목 곳곳 간판을, 그리고 간판 자국을 우리는 예사롭게 볼 수 없다.

황희진 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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