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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9월 26일(화) ㅣ
[세풍] 무지의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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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0 00:05:00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보석처럼 푸르게 빛나는 지구는 아름답기로 소문난 행성이었다. 많은 우주 영혼들이 지구의 삶을 동경했다. 지구에서 태어나려면 번호표 뽑고 대기해야 한다는 루머마저 나돌았다. 영혼들은 탐색이나 하고자 지구 궤도를 빙빙 돌았다.

하지만 정작 그들에게 지구에 관한 정보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 나라가 살 만하고 어느 나라에 태어나면 고생길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태어날 나라와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처지의 부모를 만날지도 백지 같았다.

상상을 해보자. 만약 당신이 이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지구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 장광설처럼 들려도 이 같은 가정은 꽤 유명한 철학적 사유 실험 중 하나다. 미국의 철학자인 존 롤즈(John Rawls)가 저서 ‘정의론’을 통해 제시한 개념인데, 이름하여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자신이 어떤 환경 아래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무지의 베일)에서 선택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특정 사회가 얼마나 공정한가 하는 원초적 물음이다. 계층, 성별, 인종, 민족, 부모의 지위`경제력 등에 대해 아무것도 미리 알 수 없다면 사람들은 자기가 택할 세상이 어떤 모습이기를 바랄까. 선택하기에 이상적인 사회는 공정 사회일 것이다. 이런 사회라면 무지의 베일 뒤에서도 걱정 없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택이 주저되는 사회는 불공정 사회다.

무지의 베일에 대입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보자. 우리나라는 과연 공정 사회인가. 태어나기 전에 정보가 주어진다면 한반도를 선택할 영혼은 몇이나 될까. 두말할 것 없이 우리나라는 불공정 사회다. 이를 보여주는 지표는 많다.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19세 이상 남녀 2천500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를 보면 부의 공정한 분배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응답이 83.6%나 됐다.

불공정한 시대상을 나타내는 도구는 더 있다. 다름 아니라 유행어다. 우리 사회의 불공정성을 꼬집는 유행어로 ‘흙수저’만큼 적나라한 것도 없다. 태어날 때부터 쥐고 태어난 것이 금수저도, 은수저도, 동수저도 아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흙수저로는 밥도 못 떠먹는다. 물에 녹기 때문이다. 유행어 ‘흙수저’에는 아이티 아이들이 배고파 구워먹었다는 ‘진흙쿠키’를 연상케 하는 상실감이 녹아 있다. ‘헬 조선’ ‘노오력’도 빼놓을 수 없는데 사회의 집단의식이 반영되지 않고서는 이런 신조어들이 유행할 수 없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에 의해 ‘꼰대’라고 불리는 기성세대 입장에서는 이 같은 유행어 자체가 마뜩잖다. 혹자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와 같은 ‘헝그리 정신’이 없다며 개탄스러워 한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간극은 태평양만큼이나 벌어지고 있다.

이미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세상은 더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인구 구조상 격변은 필연적이다. 올해는 인구절벽 현상의 원년이고 내년에는 베이비부머 세대의 본격적인 은퇴가 시작된다. 인구절벽과 베이비부머 세대의 은퇴는 부동산시장과 금융`산업 등 실물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 베이비부머 세대의 퇴장은 기성세대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지고, 정치 지형에도 전에 경험치 못한 파급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이런 시대 흐름을 간파한 이들에게 미래는 기회일지 모르나,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가혹한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특히나 정치가 그렇다. 여기에 보수나 진보라는 이분법적 구분 따위는 무의미하다.

김해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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