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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詩·그림을 만나다] 판의 미로(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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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09 06:00:02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은 모르던 지하왕국, 행복과 평화로 가득 찬 환상의 이 세계에 공주가 있었다. 햇빛과 푸른 하늘이 그리웠던 공주는 인간 세계로의 문을 열고 나간다. 그러나 너무나 눈부신 햇살에 공주는 기억을 잃은 채로 죽어간다.

판타지영화의 맛은 대부분 달콤하다. 냄새 또한 향긋하다. 그러나 ‘판의 미로’에서는 맛과 향이 전혀 다르다. 엉겨 붙은 피의 맛, 오랫동안 썩은 나무뿌리 냄새가 난다.

이 영화는 스페인내전(1936~1939)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찍이 피카소가 ‘게르니카’로 초토화된 인간성을 그렸고, 헤밍웨이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통해 좌우의 극한 대립을 작품 속에 녹여 넣었던 그 내전이다.

스페인은 절대 왕정이 비교적 오래 유지되면서 계급갈등과 좌우대립 등 정치적 굴곡이 심했던 나라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민초들의 삶 또한 피폐해졌다.

‘판의 미로’는 이러한 현실의 체험을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극대화한 작품이다. 그래서 ‘게르니카’처럼 잔혹하고 또 기괴하다.

전쟁의 한복판에 떨어진 소녀. 여리고 착한 소녀가 총과 칼, 잔인한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다. 벽에 금을 그어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만드는 마법분필은 소녀의 간절함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환상이다.

어떻게 하면 망가진 현실을 벗어나 평화의 땅으로 갈 수 있을까.

미로에서 만난 기괴한 요정 ‘판’은 세 가지 과제를 낸다. 병들어 말라가는 나무를 살리기 위해 거대한 두꺼비의 뱃속에서 열쇠를 꺼내오고, 괴물을 피해 화려한 식탁의 음식을 보고도 참아야 하고, 갓 태어난 남동생을 위해 피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

각 과제에는 용기와 인내, 희생이 필요하다. 이 세 가지는 전쟁의 대척점에 있다. 결국 오필리아의 미션은 전쟁을 일으킨, 요란벅적한 어른들이 하지 못한, 하지 못할 미덕인 것이다.

예순을 넘긴 시인 문인수는 ‘판의 미로’에서 숲을 보았다.

태고의 기억을 간직한 나무, 시퍼렇게 우거진 이파리, 그 사이에 일렁이는 바람··· . 숲은 말이 없다. 그 속에선 온갖 포탄소리와 고함 등 인공의 소리가 빠져나오지 못한다. 잠잘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미친 듯 헤매던 전쟁이 제 발길에 망가진 나무 곁에 천천히 눕는' 곳이다.

전쟁에는 길이 없다. 숲도 본래 길이 없다. 그러나 전쟁은 파멸로 치닫지만 숲은 또 다른 길을 내어준다. 하늘의 길과 지하의 길이다. 꿈을 꾸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다.

화가 손파 또한 숲을 그렸고, ‘문과 문’이란 제목을 달았다. 문은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판타지의 필수 항목이다.

화폭의 중심에 자리 잡은 거대한 나무는 위대한 자연의 힘을 상징하는 ‘판’이다. 맑고 깊은 눈으로 침묵하며 태고부터 세상을 지켜보는 숲이고, 나무이다.

화가는 중간을 잘라 환상과 현실의 두 상황을 단색조와 컬러로 대비시켜 그렸다. 어느 것이 현실일까. 회색톤의 단색이 비정한 현실이다. 포탄에 탄 나무와 불에 그을린 흙은 더 이상의 생명력을 갖지 못하는 죽음의 땅이다.

오필리아는 이 죽음의 땅을 살리기 위해 희생한다. 따스한 햇볕과 푸른 하늘을 보기 위해 세상에 나온 공주는 대지를 흥건히 적시는 피의 전쟁과 차가운 금속성에 의해 숨을 거둔 것이다.

냉혹한 현실처럼 차가운 그녀의 몸에 따뜻한 빛이 감돌더니, 천국의 색인 황금색으로 변해간다. 그렇게 보고싶어 했던 따스한 햇살이 그녀의 몸속, 판타지 속에서 피어난다.

가혹한 현실을 잠재운 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다. 그것은 가냘픈 소녀, 오필리아의 꿈이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판의 미로-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Pan's Labyrinth, El Laberinto Del Fauno, 2006)

감독:길예르모 델 토로

출연:이바나 바쿠에로, 더그 존스

러닝타임:113분

줄거리:오필리아는 만삭인 엄마와 함께 군인인 새아버지의 부대 저택으로 이사를 간다. 냉혹한 새아버지에게 두려움을 느끼는데다, 신비한 숲으로 둘러싸인 저택의 이상한 분위기에 잠을 못 이루던 오필리아(이바나 바쿠에로)에게 요정이 나타난다. 신비로운 모습에 이끌린 오필리아는 요정을 따라 미로로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판’(더그 존스)이라는 기괴한 요정을 만난다. ‘판’은 오필리아에게 그녀가 지하왕국의 공주였으나 인간세계로 나왔다 돌아가지 못하고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다시 공주로 돌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세 가지 미션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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