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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나를 지운다…실패 속에서 '자기실종' 택한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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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02 00:05:01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인간증발/레나 모제 글/스테판 르멜 사진/이주영 옮김/책세상 펴냄

1989년 주가 급락을 시작으로 부동산 가격 폭락, 경기침체, 디플레이션이 이어지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의 늪에 빠졌고 이후 매년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라졌다. 그중 8만 5천 명 정도가 스스로 실종을 택한 사람들이었다. ‘자기실종’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1990년대에 그 숫자가 급증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매년 12만 명이 사라졌다.

그들은 빚, 파산, 이혼, 실직, 낙방 같은 각종 실패에서 오는 경제적 어려움과 수치심,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어느 날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자기실종을 택한 사람들은 신분을 숨긴 채 혹은 다른 신분으로 위장한 채 도쿄의 슬럼 지역인 산야나 오사카의 가마가사키 등에 숨어 산다. 한국 사회가 시차를 두고 일본을 따라가고 있음을 고려할 때, 일본 사회에 만연한 자기실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야반도주 사무소를 운영하는 사람들

1990년대 말, 일본에서는 ‘야반도주 사무소’라는 제목의 TV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영됐다. TV프로그램 안내 코너에 이 드라마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재정난에 빠지셨나요? 빚더미에 앉았나요? 컨설팅 회사 라이징선이 여러분을 도와드립니다. 대책을 세우기엔 너무 늦었나요? 도망치거나 자살하는 길밖에는 없나요? 역시 라이징선에 맡겨보세요.’

드라마 ‘야반도주 사무소’는 1990년대 일본 사회 ‘야반도주’ 현상을 드라마로 제작한 것이다.

야반도주를 돕는 업체들은 외견상 이삿짐센터이지만 은밀하게 도주를 돕는다.

하토리 쇼 씨는 야반도주 사업으로 꽤 돈을 번 사람이다. 그는 야반도주 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평범한 이삿짐센터를 운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인으로부터 ‘자신의 인생을 망친 남편의 빚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야반도주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새 사업에 뛰어들었다.

야반도주 서비스 비용은 대략 40만엔(약 400만원)으로 일반 이사보다 세 배나 비쌌다. 도망치려는 사람의 상황이 심각할수록, 그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대비 역시 철저하다. 야반도주에 성공하기 위해 하토리 쇼 씨는 도주를 신청한 고객과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그려가며, 가장 좋은 은신처를 찾고, 예상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작성했다.

◆빚뿐만 아니라 수치심도 실종 큰 이유

세계 어느 나라에나 빚 때문에 야반도주를 택하는 사람들은 많다. 일본인들의 자기실종도 대부분 빚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자기실종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수치심이다. 빚에 눌린 사람들뿐만 아니라 시험을 망친 대학생, 남편이 바람난 여자, 자신이 바람난 여자, 회사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실패했다’는 손가락질이 두려워 실종을 택한다.

노리히로 씨는 마흔 살까지 잘 나가는 엔지니어였다. 그는 어느 날 해고됐다. 해고를 당했지만 평소와 똑같이 생활했다. 여느 때처럼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했고, 예전에 다녔던 직장 앞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퇴근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길에서 시간을 때우다가 집에 돌아갔는데, 아내와 아들이 의심하는 것 같더군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가져다줄 월급도 없었고요.”

원래 같았으면 월급을 받았을 날, 노리히로 씨는 말끔히 면도를 하고, 아내에게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한 후 평소 타던 지하철을 탔다. 회사의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열차였다. 그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카에 씨는 스무 살에 증발해버렸다. 회계시험을 보러 간다던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그의 부모는 아들의 친구와 학교에 연락한 것은 물론이고, 탐정들을 고용해 아들을 찾아 나섰다. 탐정들은 운 좋게도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사카에 씨를 찾아냈다. 사카에 씨는 시험에 불합격해 가족들에게 실망을 안겨줄까 두려워 시험을 치지도 않았다. 자살을 생각했지만 어떻게 목숨을 끊어야 할지 몰라 거리를 배회하던 중에 탐정들에게 발견됐던 것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일본인

일본 사회는 실패나 실수에 관대하지 않다. 남들과 다른 특징에 대해서도 싸늘하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반듯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스스로 큰 강박을 느낀다.

지은이는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인들을 연구하기 위해 미국 전시정보국이 인류학자 루스 베딕트에게 의뢰해 쓴 책 ‘국화와 칼’을 인용하며, 일본인들의 심리상태를 설명한다.

‘일본인들은 넓은 의미에서 윗사람들(조상, 부모, 교수, 심지어 일왕)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진다. 이 빚을 갚는 것은 체면과 관련된 문제다. 대부분 일본인들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지 않으려고(심리적이든 물질적이든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빚을 지고 있다는 이 독특한 감정은 의무를 요구한다. 그중 첫 번째 의무는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 의무는 너무도 강렬해서 조그만 실수에도 일본인들은 크게 자책한다. 결국 예의를 지키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증발이나 자살을 선택한다.’

성인이 스스로 실종을 택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체면과 관련한 문제이므로 가족들도 대부분 체념하듯 가족의 실종을 받아들인다. 가족의 실종을 ‘운명’으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심지어 가족의 실종 사실을 이웃, 동료,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기까지 한다.

실종자 가족들이 사립 탐정을 고용해 사라진 가족을 찾아나서기도 하지만, 실종자를 찾는다는 보장도 없고, 하루 비용이 5~6만엔(50~60만원)에 달해, 탐정을 고용했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실종자 찾기를 포기하고 만다.

◆지도에도 없는 장소 산야(山谷)

도쿄의 미나니 센주 지하철역에서 북쪽으로 10분쯤 걸어가면 산야(山谷)에 닿는다. 이곳은 지도에도 표기가 없다. 범죄자와 부랑자, 노숙자, 빈민들이 득실대는 곳이다. 일본 정부는 산야를 지워버리기 위해 ‘산야’라는 지명을 지도에서 지웠다. 하지만 산야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의 택시기사들은 “산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사람, 모두에게 잊힌 사람 혹은 잊히기를 바라는 사람, 이름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휘황찬란한 도쿄의 여타 지역과 달리 산야는 어둡고, 불길하며, 골목마다 쓰레기가 넘치고 지린내가 진동한다. 세계 3위 경제대국 일본의 규범과 질서가 통하지 않는 곳이다.

사라진 사람들은 건설현장, 시골마을, 산속 외딴곳으로 숨어들거나 유흥업소 말단 종사자로 살아가기도 하며, 야쿠자가 되거나 2011년 쓰나미로 원전사고가 발생해 방사능에 오염된 후쿠시마로 숨어들기도 한다.

실종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주민등록이 소멸돼 사회보장 혜택이 말소된다. 사실은 실종 순간부터 그들은 제도의 혜택을 포기한다. 위치가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종자의 자식은 학교에 다닐 수도 없다. 숨어 지내는 것은 별문제가 아니지만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실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스스로 실종을 택했던 노리히로 씨는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새로운 삶이 자리를 잡으면 다시 본명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일 죽는다 해도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저를 찾았을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부모님이 건강히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고요.”

255쪽, 1만5천원.

조두진 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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