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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9월 23일(토) ㅣ
[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3>-엄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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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1 17:08:57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계승은 남자를 따라 작은 암문을 통해 궁으로 들어갔다. 주위가 캄캄해서 길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 궁궐 수비대와 맞닥뜨리긴 했지만 그들은 둘을 모는 체했다. 밤 11시쯤 되었을 것이다. 장상만에게는 러시아공사관 옆, 여관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궁의 한가운데 있는 중화문에서 난폭한 발자국 소리가 어둠을 타고 우두둑우두둑 들려 왔다.

  계승은 들어간 곳은 무지개 형 창문이 달린 2층 벽돌 건물이었다. 현관 처마에 중명전이라고 쓰였던가. 궁궐 안에 서양식 건물이 있는 것은 뜻밖이었다. 엄청난 청기와와 아름드리 기둥을 거느린 화려한 궁궐을 상상했던 계승에게는 서양식 건물이 기이하게 느껴졌고, 오히려 침착해지려고 다짐했던 마음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버렸다.

  천장이 높고 바닥이 반질반질한 복도를 걸어서 1층 끝 방으로 들어갔다. 전등이 켜진 방에서 책들이 꽂힌 서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경복궁 집옥재에서 옮겨온 책들일 것이다. 황제의 집옥재 서가는 김광제가 자주 거론하던 것이었다. 서울을 새로운 도시로 만들려고 하는 황제의 야심이 집옥재 서가에 있다는 것이다.

  “폐하께서 독서를 좋아하시네. 늦은 밤에 자주 중명전으로 오셔서 책을 읽으시지.......”

  같이 온 남자는(안호영이라는 내시였다.) 벅찬 투로, 그러나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계승은 서가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방에 놓인 긴 장방형 탁자에, 한 시간쯤 전에 신문사에서 만났던 이가 앉아 있었다. 이준이었다. 계승은 소스라칠 뻔했다. 그가 팔을 벌려 계승에게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이준이 안호영에게 말했다.

  “오는 길에 별일 없었겠지요?”

  “평리원 검사 나리. 폐하께서는 두려움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모든 백관들도 폐하의 담대함을 본받길 원하십니다...... 공께서 떠나실 날짜가 언제입니까? 준비는 다 되셨지요?”

  어딜 떠난다는 말일까.

  “해아(海牙,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6월 15일에 열립니다.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가려면 시일을 많이 당겨야 합니다.”

  이준이 대답을 하자 안호영이 계승을 돌아보았다.

  “가지고 온 것을 꺼내놓게.”

  계승은 윗도리를 벗고 실로 봉합한 등을 뜯었다. 잘 접혀진 보들보들한 당지는 조금도 구겨지지 않은 상태였다. 세밀하고도 힘찬 글씨가 탁자 위로 펼쳐졌다. “신필(神筆)이신 석재 선생님이 쓴 국채보상 취지문입니다.” 계승은 자랑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왜 이것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준은 글씨를 따라 손끝을 대면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안호영은 취지문을 골똘히 보더니 폐하의 뜻이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은 오늘날 백성들의 심장입니다! 폐하께서는 공(公)이 해아로 떠날 때 백성들의 심장을 품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듣고 있는 이준도, 말을 한 내시도, 취지문을 가져온 계승도. 한동안 셋은 탁자 위에 둔 취지문 휘호에 두려운 시선을 얹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먼저 몸을 틀어 말한 것은 안호영이었다.

  “다행히 이 글을 궐 안으로 가져오긴 했지만 다시 내가기는 힘듭니다. 무슨 일이 생길는지. 모레, 상궁이 상동교회로 가져가 전덕기 목사에게 맡겨 놓겠습니다. 해아 평화회의 위임장과 같이 말입니다.”

  대한매일신보사에서 영자신문을 뒤적이던 양기탁이 네덜란드 해아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사실을 전덕기와 이준에게 알렸다는 것을 계승은 알 리가 없었다. 그들이 상동교회 지하실에 모여 황제에게 평화회의 특사로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자고 의논한 것도 계승은 알지 못했다. 이준과 양기탁은 서울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이준이 국채보상운동을 접고 해아로 떠나게 된 것은, 이날로부터 불과 닷새 뒤인 4월 22일이었다. 그리고 이 해아의 특사는 불과 석 달 후, 황제의 퇴위까지 몰고 온 1900년대 들어 가장 큰 사건으로 번졌다.

  몇 마디 말이 오간 뒤에도, 셋은 여전히 취지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휘호를 언제 거둘지, 지금 일어나야 하는 건 아닌지. 계승은 배가 고팠다. 기차에서 주먹밥을 먹은 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오줌이 마렵기도 했다. 주변은 고요했다. 아주 멀리서 대포 소리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들렸다. 바로 그때였다.

  누군가 복도로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신발을 질질 끄는 여린 소리는 기이한 진동처럼 방문이 울리고 탁자가 흔들리는 듯했다. 취지문 당지도 부르르 떤다고 계승은 생각했다. 고개를 돌리자 문 열린 방 밖에 어떤 이가 서 있었다.

  내시와 이준이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내시는 허리를 깊이 숙였고 이준은 바닥에 고꾸라졌다. 계승은 무언가가 등을 후려치는 듯했고 손을 모은 채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황제구나. 나라와 백성을 한 손에 쥐고 있는 황제구나. 잠깐 본 흰빛의 얼굴이 망막을 가득 채웠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겨우 두 걸음 앞에 거대한 불덩이가 있어서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황제가 자신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계승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라와 백성을 한 손에 쥔 자가 좁은 궁궐 하나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황제의 음성은 속이 텅 빈 허물에서 들리는 공허한 울림 같았다. 힘없이 늘어뜨린 옷자락, 창백한 얼굴. 허옇게 센 부석한 턱수염. 황제는 소매 끝을 빠져나온 가는 손목에 취지문을 얹고서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 황제가 무슨 말을 했던가. 의정부 대신들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칙어를 내렸다는 이야기, 자신도 보상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 취지문의 한 글자마다 백성들을 감동시켰듯이 자신도 그러하다는 이야기, 이 자구들이 백성들의 심장을 흔들었듯이 자신의 심장도 뛰고 있다는 이야기...... 좀전과는 다르게 계승은 황제의 음성을 들으면서 스러지는 나라의 제왕이 품고 있는 거대한 비애를 느꼈다. 까마득한 슬픔의 깊이도. 제왕의 슬픔은 어딘가 달랐다. 그 비탄이 흰빛 나는 황제의 온몸에서 울러 퍼지고 있다고, 잠시 후 바닥에 엎드려 작별을 고하면서 계승은 생각했다.  

  계승이 러시아 공사관 옆, 여관으로 돌아온 것은 자정에 가까워서였다. 장상만은 2층 방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여관 주인이 갖다준 떡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황제를 만났어?”

  “그래.”

  “어떻게 생겼지? 우리하고 같아?”

  “나중에 황제가 방으로 들어오셨어.” 계승은 황제의 용모와 표정, 그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랑 달랐지. 황제를 보는 것이 산기슭에서 거대한 산을 우러러는 것 같았어.” 하지만 슬픔이 담긴 뜨거운 목소리, 비탄의 물결 위로 솟구치는 황제의 고독한 기백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황제 앞에서보다 오히려 중명전을 나와서 내시의 안내를 받고 월곡문이라는 작은 암문에 도착했을 때 더 격심하게 느꼈다. 허리를 숙여 작은 문을 몰래 빠져나오던 계승의 눈에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황제의 옥새가 찍힌 작은 문서를 받아 등에 넣었기 때문에 더 눈물이 났을 것이다. 조그마한 종이에 “백성이여 힘차게 일어나라”라고 쓴 한글 문장. 황제는 꼭 서석림 김광제에게 그 말을 직접 전하고 싶었을까. 끝이 날렵하고 힘차게 뻗은 작은 글씨에, 탄탄하게 찍힌 붉은 인장. 계승은 또 눈시울이 더워졌다. 눈두덩에 팔을 걸치고 잠을 청했다. 소매가 조금씩 젖었다.  

  

  이튿날이었다. 오전이라선지 서울 정거장은 많이 붐볐다. 의주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서울에서 출발하는 기차였다. 화물차가 두 냥이었고 객차가 다섯 냥인 긴 열차였다. 계승은 상경할 때처럼 등을 의자에 기대지 못하고 꼿꼿이 세웠다. 등에 황제의 작은 칙유가 넣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취지문과 다르게 황제의 더운 입김이 등에서 후끈거렸다. 천안을 지나자 피로가 엄습했다. 아마 까북 졸은 것 같았다.     계승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칙유가 구겨졌을지 모른다. 3등실 안은 한인들로 북적거렸다. 일인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한때 3등 칸을 죄다 차지하고 있는 게 일인 노무자들이었지만 그들은 빠르게 1,2등 칸으로 옮겨갔다. 옆에서 장상만은 잠에 빠져 있었다. 대전 정거장에서 기차가 멈췄다. <계속>

엄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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