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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1일(토) ㅣ
[최진석의 老莊的 생각] <11>무엇인가를 그려서(文) 변화를 야기(化)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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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0 00:05:01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한단의 걸음걸이 배우려다 제 걸음 잊으니 기어갈 수밖에
 
송필용 작.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한반도 남쪽 구례 땅에 황현(黃玹`1855~1910)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호는 매천(梅泉)이다. 그는 20대에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과거시험을 보았는데, 초시(初試)에서 첫째로 뽑히고도 전라도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앉혀졌다. 이로 인해 매천은 온 나라에 가득 찬 편견과 부패를 몸소 겪어보게 되었고, 바로 분기탱천하여 다음 시험은 보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그렇게 5년을 보냈다. 나중에 부친의 바람이 하도 간절하여 어쩔 수 없이 다시 상경해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했다. 장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된다. 34세의 나이에 성균관의 생원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여전한 관료계의 부정부패였다. 이에 신물을 느낀 매천은 관직을 버리고 다시 귀향한다. 관리의 길을 포기하고 재야 학자로서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매천이 초야에 묻혀 학문을 닦고 있을 당시 대한제국은 급격히 비극적인 상황으로 내몰렸다. 나라는 분열되어 통합하지 못했고, 당연히 국력은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약해졌다. 그러다 보니 대한제국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조차 없었고, 한반도 온 천지에 '독립'이라는 단어가 설 자리는 반 뼘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서로 차지하려고 중국과 일본은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전쟁에서 이겼고, 우리는 일본의 손아귀로 넘어갔다. 나라가 사라져버렸다. 매천은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나라에서 선비를 500년이나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한 처지에 이르러도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견딜 수 없다"는 말을 자식에게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는 매천이라는 야인(野人)의 자격으로 쓴 비사(祕史), 『매천야록』(梅泉野錄)을 남겼다. 고종1년(1864)부터 융희4년(1910년)까지의 47년을 담았다. 마지막 문장에서 비통함은 극에 이른다. "나라가 망했다. 전 진사 황현, 약을 먹고 죽다."(韓亡. 前進士黃玹, 仰藥死之.) 경술국치(庚戌國恥) 바로 그날이다. 그가 목숨을 끊기 전에 남긴 절명시(絶命詩) 한 편이 이 비참한 풍경에 겹친다. "새도 짐승도 슬피 울고, 산과 바다도 찡그리누나./ 무궁화 피는 우리나라는 이미 망하고 말았다./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지난날 돌아보니/ 세상에 글자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이렇게 보면 매천은 글자(문자) 아는 사람, 즉 식자인(識字人) 노릇 하느라 스스로 죽었다.

대체 글자(字)니 문자(文字)니 하는 것이 무엇이어서 매천은 그것을 아는 사람 노릇 하느라 목숨까지 내놓았을까? 문자의 가치가 목숨에까지 올라가는 것이라면, 그것이 인간의 존재 의의와 붙어 있다는 말 아닌가. 문자를 잘못 다루면 독립도 지키지 못하고, 문자를 아는 사람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하겠다. 그럼 문자라는 것은 도대체 얼마나 높이 있다는 말인가.

인간은 자연이라는 세계에 내려와 무형 유형의 무엇인가를 만들고 제조하고 생산하여 변화를 야기한다. 무엇인가를 만들고 제조하고 생산하는 일을 '그린다'(文)라는 말로 포괄한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은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그려서[文] 변화를 야기하는[化] 존재, 즉 문화(文化)적 존재다. 인간이 누리는 문명은 모두 제작하고 생산하는 문화적 활동의 결과다. 인간이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문화적 존재라면 문화적 활동 즉 무엇인가를 제작하고 생산하여 변화를 야기하는 일의 효율성이 생존능력을 좌우한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이 문화력의 증진에 맞춰진다. 문화력의 증진이 바로 생존의 질과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문화력이 높은 나라는 앞서고, 문화력이 뒤처진 나라는 뒤따른다.

문화력에서는 '상징'하는 능력이 강한 힘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숫자가 있다. 숫자는 상징의 한 형태다. '2'를 보자. 구체적인 세계에 '2'라는 상징 기호에 해당하는 경우는 무한대로 많다. 무한대로 많은 그 경우들을 그냥 하나의 숫자 '2'로 모두 압축할 수 있다. 얼마나 편리한가. 숫자를 아는 사람은 무한대의 다양한 '2'의 모든 경우를 하나의 숫자로 압축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 다양한 경우를 모두 형편에 따라 열거해야 한다. 이 편리함이 효율성을 보장한다.

더하기 빼기만 할 줄 아는 사람과 3차 방정식을 풀 줄 아는 사람이 있다. 둘 사이에는 상징의 높이가 다르다. 더하기 빼기의 높이보다 3차 방정식이 높다. 더 높으면 더 큰 통제력을 가진다. 더 큰 통제력을 가지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상징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통제력과 영향력은 더 커진다. 예술은 예능에 비해 더 추상화되었다. 당연히 예술의 높이가 예능의 높이보다 높다. 그래서 예능의 높이에 있는 사람보다는 예술의 높이에 있는 사람이 더 큰 힘을 갖는다. 기능은 기술보다 추상화의 정도가 낮다. 기능은 기술보다 힘이 약하고, 기술은 기능보다 강하다. 이처럼 문화력은 결국 능력 혹은 힘으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숫자'를 구성하는 내용이 아니다. 숫자를 생산하고 사용하는 바로 그 높이다. 문자는 문화 활동의 정점이자 문화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이며 효율적인 장치다. 문자는 문화력의 시원(始原)이자 정점이다. 문자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개별 문자가 함축하는 내용을 살피는 일이 아니라 문자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높이에 도달하는 일이다. 문자나 숫자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보다도 그것이 상징하는 '높이'의 맥락에서 살펴져야 한다.

문화력이 생존 능력이나 높이를 결정한다. 여기서 사람이나 국가가 갈래 진다. 누군가는 문화적 활동으로 변화를 야기하고, 누군가는 문화적 활동으로 야기된 변화를 수용한다. 변화를 야기한다는 말은 아직 열리지 않은 곳으로 이동한다는 뜻이다. 바로 창의적 활동이다. 문화적 활동이라면 당연히 창의적 활동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앞의 말을 달리 표현하면, 누군가는 창의력을 발휘해서 세상을 새롭게 여는데, 누군가는 창의적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한다. 독립적인가 종속적인가 하는 것은 여기서 결정된다. 자유와 부자유가 갈래 지는 곳도 바로 여기다. 문자를 안다는 것은 문화적인 활동이 일어나는 정점의 높이에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 독립적이고 자유로우며 창의적이라는 말과 같다. 매천은 식자인(識字人)으로 살기 어렵다는 말로 자신과 조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이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음을 밝힌다. 그는 점점 독립과 자유를 상실하고 종속성의 나락으로 빠져가는 조국과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특별한 높이에 도달해 있던 한 지성인으로 하여금 죽음으로 '자존'을 지키게 한 이유다. 매천은 문자를 기능적인 도구로 이해하여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논하는 일에 빠져 있던 학자가 아니다. 그는 문자가 인간 정신의 승화이자 문명의 정점에서 삶을 지배하는 것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한 매우 높은 자리에 선 사람이었다.

문자가 문화적인 높이에서 작동할 때 나오는 중요한 일은 개념 제조 능력, 즉 '개념화' 능력이다. 문자적인 높이에 있는 사람은 '개념화'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개념화'의 결과인 '개념'을 수용한다. '개념화'는 인간이 세계를 전략적(전술적이 아님)으로 다루는 일이다. '개념화'는 바로 세계를 장악하는 일이다. 부연하면,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이고, 그 개념을 매개로 새롭게 판을 짠다는 뜻이다. 그래서 개념을 제조하는 일은 창의적인 활동의 대표적인 한 유형이다. 이것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해나가는 매우 진보적인 상황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와 달리 '개념'을 수입한다는 말은 개념 제조자가 벌인 판 속으로 기어들어가서 그 의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동아시아에서 근대화의 주도권은 일본에 있었다. 과학, 철학, 세포, 해부 등등 근대를 상징하는 거의 모든 개념이 일본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개념화'를 하면 앞서고, '개념화'의 결과인 '개념'을 수용하기만 하면 뒤따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남에 의해 이미 정해진 명제를 분석하는 데 열심인 자신을 마치 명제를 만든 사람과 동격인 것으로 착각하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미 있는 것을 따르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으로 활동의 대부분을 채우며, 이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해한다. 이미 있는 것에 협조하거나 따라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얻는 삶, 종속적인 삶의 전형적인 형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문자 세계를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 외부의 개념들을 따라 우리 삶을 꾸리는 것으로 만족해한다. 새로 지은 건물이나 아파트 이름은 죄다 외국말이다. 외국에서도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라틴어로 짓기도 한다. 기본적인 소통도 안 되는 말들을 걸어놓고, 서로 바라보며 웃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로 채워지는 삶이 어떻게 독립적일 수 있겠는가. 삶의 현장과 그 현장을 다루는 상징이 분리되어 있는 삶이라면 거기서는 어떤 문화적 생산성도 일어날 수 없다. 삶과 개념이 분리된 상황에서는 삶의 현장을 자신의 경험으로 구체화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중가요 안에 영어 몇 소절은 반드시 들어간다. 가수들 이름도 외래어 일색이다. 일본의 '오타쿠'는 그대로 한국의 '덕후'가 된다. 외부의 개념화 결과를 그대로 내면화한다. 독립적으로 소화해서 최소한의 2차적 개념화도 시도하지 않는다. 창의적 결과가 터져 나오지 않는 일, 시민 의식이 약한 일, 지식과 이론을 수용만 하고 생산하지 못하는 일 등등이 모두 '문자'를 대하는 이런 일들과 따로 있지 않다. 매천은 문자를 아는 사람, 즉 식자인(識字人) 노릇을 못한다는 사실을 목숨과 바꿨다.

문자의 높이는 따라 하기를 넘어선다. 따라 하기로 여기까지 온 우리는 '식자인'(識字人)의 품위를 회복해야 한다. 비록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문자'적 독립의 길을 걷기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개념'이 아니라 '개념화'다. 자신의 문자와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세계를 전략화한다. 이것이 죽지 않고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장자』(莊子) 「추수」(秋水)편에 나오는 얘기다. 수릉(壽陵)에 사는 젊은이가 조(趙)나라의 서울 한단(邯鄲)으로 걸음걸이를 배우러 갔다. 그때는 그곳의 걸음걸이가 세계적으로 유명할 때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한단의 걸음걸이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기 자신의 고유한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나중에는 기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건명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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