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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한 장…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박윤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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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0 13:56:36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서재 겸 사무실로 쓰는 방을 정리한다. 강산이 한 번 바뀔 동안 쌓인 짐들이 한 트럭은 될 듯하다. 선생님이란 호칭이 쑥스럽기만 하던 것이, 제 자리인양 쌓여가는 물건 만큼이나 익숙해졌다. 책상을 학원문과 정면으로 보이게 배치했다. 분위기가 훨씬 좋아 보인다.

  십여 년 전 인생의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한 가정주부에서 무언가 사회에 봉사하는 선생님으로 거듭나고 싶었다. 교육청에 등록할 서류가 여러 가지 필요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자격요건이었다. 방송통신대학교 정문에 서서 한 참을 서성거렸다. 위축되고 자신이 없었다. 자동 출력기 앞에 섰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심스럽게 이름과 전공학과와 학번을 눌렀다. 시원스럽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학위 증명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한다. 떨리는 손으로 가슴에 안고 읽고 또 읽었다. 이제 교육청에 제출할 서류를 다 갖추었다. 스스로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여, 남편에게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종이 한 장의 소중함을 되새겨본다.

  남들처럼 학창시절을 보내지 못한 서러움은 가슴 밑바닥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들의 학업이 올라갈수록 못난 부모가 될 까봐 두려웠다. 그 동안 사업하는 남편을 내조하면서 손에서 책을 놓아 본적이 없다. 크나큰 결심을 하고 대입시험을 위해 교육청에 체력장원서를 냈다. 남편에게 보여줬더니 한 숨만 쉬었다. 남편의 사업은 작은 업체라 경리일을 도와줘야했다. 또 아이들 뒷바라지며 시어머니 병수발 등 역할이 많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기는 무리였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방송통신 대학교였다. 스스로 공부하고, 출석일수도 적고, 등록금도 저렴하다. 하버드서원으로 원서상담을 받으러 갔다. 만학도가 많은지 인기학과는 불합격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안전하게 국어국문학과에 원서를 냈다.

  겨울 끝자락 봄을 재촉하는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만물을 소생 시키는 단비와 함께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반가움에 하루 종일 눈물을 질금거렸다. 왕언니라 불리며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고2학년 큰아들에 중3학년 작은아들, 그리고 나까지 남편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온 가족이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에 언제나 흐뭇해하는 남편이 초인처럼 느껴졌다. 안 사람이 공부하려고 하면 허락은 고사하고 면전에서 타박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정규대학을 보내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기대에 저버리지 않으려고 학점관리에 충실했다. 가끔씩 출석수업을 하는 날이면 학교까지 등교를 시켜주는 남편이었다. 명실공이 나의 후견인이 되었다.

  가정주부가 학업을 마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정 팔남매 시집 팔남매, 양가의 둘째라는 위치는 하루도 평온한 날이 없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등등 중요한 시험이 닥아 올라치면, 예기치 않던 크고 작은 일들이 발생했다. 밤새워 공부 했지만 형제들의 일 처리가 우선이었다. 그러다보면 시험시간을 맞춰서 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시험을 포기하려 하면 그 때 마다 남편의 한마디. “어렵게 시작한 일일수록 포기하지 마라 나중에 후회가 더 큰 법이다.”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고는 협력학교인 k대학교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곤 했다. 이러기를 팔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사 년제 대학이지만, 만학이라는 단점과 주부라는 입장을 저버릴 수 없는 처지여서, 영어학점 이수와 논문 쓰기에 많은 시간이 소요 되었다. 처음의 마음으로 끝까지 후원을 아끼지 않은 남편이었다. 남편은 배움에 목말라 하던 내 인생의 맑은 샘물 같은 반려자요, 나의 키다리 아저씨이다.

  ‘한문학원교습소’는 자격지심에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나에게 자존감을 가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스로 아정(我庭)이라는 호를 지었다. 나의 뜰에서 묘목을 키우듯 아이들을 기르고 싶은 꿈을 꾸게 되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따갑다. 언감생심 학원 선생님이라니, 닥터설비나 하는 주제에. 백안시 하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조심 한 발짝 씩 나아갔다. 앞쪽 벽에는 커다란 칠판을 설치하고, 뒤쪽 벽 전면에 천자문을 붓글씨로 정성을 다 하여 써서 붙였다. 제법 교실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처음 학부형이 상담을 하던 날, 마음은 무척 떨고 있었다. 다행히 아이를 보내겠다고 한다. 선생님이라 불러 줄 유일한 학생이 생겼다. 가슴이 뛴다. 꿈같은 현실이다. 어느 듯 한명이 스무 명이 되고, 학원수업은 무르익어갔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매일 쓰고 읽기를 학생들 보다 더욱 열심히 한다. 학생들을 지도하는 사자소학에 부모님의 은혜에 대한 마지막 구절이 있다. ‘욕보심은 호천망극(欲報深恩 昊天罔極)’ (깊은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하늘처럼 다함이 없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남편이 베푼 은혜가 이보다 못하지 않다는 생각에 이른다.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만이 은혜의 전부가 아닐 것이다. 남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애가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인간애의 근본은 효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학생들 마음에 조그마한 효의 싹을 심어주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될는지.  

  말끔하게 정리 된 책상 앞에 앉아서, 학생들의 수업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종이 한 장의 값어치를 가슴 깊이 생각하면서……

박윤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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