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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윤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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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0 13:57:42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책장을 정리하다가 옥천댁 앞이라고 쓴 편지 한통을 발견했다.

책갈피에 찔러놓은 체 오랫동안 까맣게 잊었던 편지가 기억의 저편으로 나를 데려갔다.

내가 옥천댁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 조부모님은 고향본가에 사셨고 우리 자매들은 학교 때문에 읍내에서 따로 살았다. 나는 조석으로 할아버지 댁에 들러 할머니의 식사준비를 도왔다. 너무나 권위적인 할아버지가 무서워 우린 서로 가라고 미루다가 끝내 가위 바위 보로 순번을 정했다. 할머니는 어린 동생보다는 내가 와 주기를 바라고 용돈도 주시며 구슬리곤 하셨다. 어느 날 할아버지 집에 가보니 산뜻한 색깔의 한복을 입은 낯선 여자가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를 본 그녀는 “네가 현이구나,” 라고 알은 체를 하며 살갑게 웃었다. 그리고 상차림을 마친 그녀는 할머니에게“ 어머니 갔다가 내일 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할머니는 애썼다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 말씨나 눈빛은 정감이 가득 넘쳤다. 그녀와 할머니가 하는 말을 듣고 짐작은 했지만 그 여자가 말로만 들어오던 아버지의 첩 옥천댁 이었다. 집에만 있는 엄마보다 젊고 예쁘게 보였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이 옥천댁 때문에 엄마가 또 약을 먹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아버지의 바람기 때문에 엄마가 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엄마는 웃음을 잃고 말수도 적어졌다. 가끔 “내가 어서 아들을 낳아 대를 이어야 하는데...”하면서 한숨만 내쉬었다. 딸만 다섯을 낳은 엄마는 밖으로만 도는 아버지를 거의 포기한 듯 했다. 아버지가 또 새 여자를 봤다는 소문이 들리면 “잘난 사내 열 기집 못 거느리겠냐.” 그렇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봉건주의적 유교사상이 몸에 배인 할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부덕을 갖춘 지혜로운 며느리라고 칭찬했다. 엄마는 안주인의 체통과 예의범절을 지키려고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러나 정작 남편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었으니 아내로서의 삶에 무슨 낙이 있었을까? 엄마는 약을 먹은 후유증으로 위장이 상해 음식을 맘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가끔 음식물을 게워 내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항상 겁이 났다. 만약 엄마가 죽으면 그 자리는 옥천댁 차지가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싫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외도는 대부분 그냥 스쳐가는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옥천댁 과는 정이 꽤 깊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여자가 우리가 받아야할 사랑을 빼앗는다고 생각하니 증오심이 싹텄고 아버지도 미웠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엄마가 임신을 했다. 이번에는 꼭 남동생을 낳아 아버지를 집으로 오시게 해야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무렵 옥천댁도 임신을 했다. 나는 만약 옥천댁이 아들을 낳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옥천댁 에게 장문의 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 다음날 옥천 댁을 찾아가서 밤새 끙끙거리며 쓴 편지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와버렸다. 엄마가 곧 동생을 낳을 테니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내용이었다. 동생들은 철도 없이 잘 대해주는 옥천 댁을 따랐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아버지 곁에 있는 이상 엄마의 마음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좋아할 수 없었다. 내 마음을 읽은 옥천 댁은 그 후 나를 다시 만난 자리에서 망설이다가 울먹이며 “네 엄마가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는 집으로 가실거야” 라고 했다. 그리고 엄마가 아들을 낳으면 자기는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그렇게 오매불망 원하던 아들을 낳았다. 우리 자매들과 엄마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남동생의 재롱으로 집안에는 생기가 돌았다. 바람이란 어떤 위력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잦아들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할퀴고 지나간 상흔이 얼마나 깊었던지 엄마는 여전히 쉽게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이제 옥천댁은 아버지와 사랑이라는 일시적인 회오리바람 속에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가 남동생의 출생으로 첩의 자리를 내어 놓아야할 벼랑에 서게 되었다.

어느 날, 남동생을 안고 가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돌아보니 옥천댁 이었다. 많이 수척해 보이던 그녀는 내게서 동생을 빼앗듯이 받아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남동생에 대한 애증이 한꺼번에 밀려드는지 팔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 쉽지 않은 용단을 내린 듯, 이제 자기를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를 지우고 떠날 준비를 했던 모양이었다. 나 때문에 모성애를 포기했다고 생각되어 그동안 그녀를 무작정 미워했던 마음에 갑자기 죄의식이 확, 밀려와서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또 다시 한 통의 편지를 써들고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그녀를 찾아갔다. 문을 두드리니 빈방을 지키고 있던 그녀가 반갑게 맞았다. 그냥 편지만 건네주고 돌아오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내손을 억지로 잡아끌어 안으로 들였다. 처음으로 본 작은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랫목 벽에 쳐진 수놓은 횃댓보가 신혼 방 같았다. 낮 익은 아버지의 옷도 긴 못에 걸려있었다. 옥천 댁은 내 나이 때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면서 책상위에 쌓인 책 중에서 시집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지적 수준에 순간 위축감을 느꼈다. 엄마와 우리에게도 미안하다면서 “나도 내가 이렇게 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했다.

정말 그랬을 것이다. 숨어서 불안한 마음으로 가정이 있는 남자와 떳떳하지 못한 삶을 누군들 살고 싶을까? 남의 자리에 끼어들어 살지만 옥천댁은 첩으로 손가락질 받고 살기에는 품성이 아까운 여자였다. 엄마도 딸이 많으니 팔자타박은 못한다고 말하며 옥천댁에 대해 함부로 욕하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동생을 많이 예뻐한다. 약속을 지켜주어 고맙다.”고 옥천댁 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당신에게 다시는 돌아가지는 않을 거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나는 적어간 내용을 이미 말로 했기에 받은 시집 속에 편지를 슬쩍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얼마 후 옥천댁이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 불던 바람도 잠잠해졌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었는데 가슴 한편에 아릿한 통증이 남았다. 하지만 사춘기 때 겪은 마음의 상처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뒤늦게 아버지는 당신이 가족들에게 준 고통을 깨달았는지 엄마가 많이 아플 때면 자신의 죄 값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그런 고백에 위안을 받은 것처럼 엄마는 아버지께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았다. 가장으로써 권위를 잃은 아버지는 갈수록 왜소하고 풀이 죽어보였다. 나 역시 한때는 못 견딜 것 같았던 고통이 점차 하찮게 생각되며 아버지가 불쌍했다. 나는 조금씩 아버지를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항상 시랑고랑 아픈 엄마가 먼저 돌아가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셨다.

발인 전날,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밤늦게 옥천댁이 문상을 왔다. 몇 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단번에 그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삶의 고달픔은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 뒤 결혼했지만 다시 혼자가 되었다고 했다. 혹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머뭇거리는 그 여자 손을 끌어당기다시피 하여 잡았다. 한 남자의 마음을 나누어 가지고 살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의 세월은 엄마나 옥천댁 모두 잊은듯했다. 두 여자는 다만 한 남자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나 역시 그동안 옥천댁 에게 편지를 계속 쓰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 끝맺음을 할 때가 되었다. 나는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마지막 줄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용서해달라고....그리고 내 편지 때문에 여자의 꿈을 포기했다면 나를 용서해달라고...

윤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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