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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2월 23일(금) ㅣ
[매일춘추] 소통의 약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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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00:05:00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먼 타지에서 공부 중인 내 친구 K가 있다. 그는 이미 외국 생활을 한 지 10여 년이 된 터라, 고등학교 졸업하고 거의 보지 못했던 친구이다. 큰 키와 큰 덩치에 백인들보다 창백해 보일 때도 있는 피부를 가진 K와는 고교 시절부터 자주 대화하며 서로의 미래를 그렸다. 서로 힘들 때 도와주고, 힘이 되어주려 노력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분야의 공부를 하며 꿈을 키워갔다. 그러다 얼마 전, 그가 있는 ‘패서디나’(Pasadena)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K는 바쁜 와중에 나의 숙소까지 찾아와서 자신이 자주 가는 펍(Pup)으로 나를 데려갔다. 우리는 시원한 맥주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앞에 두고 밀린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미 성공적으로 자신의 연구를 진행 중이었고, 총명하고 아름다운 여자 친구도 있었다. 무엇보다 주위에서 인정받는 과학도이자 연구자였기에 늘 믿음직한 친구였다. 몇 년 만에 얼굴을 맞대고 식사를 하면서 뭔지 모르게 달라진 친구의 표정이 읽혔다. 무표정하게 굳은 얼굴은 ‘무정동증’(Anhedonia)이 의심될 정도로 감정표현이 무뎌 보였고, 학창시절 그렇게 잘 웃던 웃음은 온데간데없었다. 타국생활이 마치 인내의 연속이었던 것처럼 마냥 지쳐 보이기만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다음 날 K의 학교 근처 다운타운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몇 년 만에 자신을 본 나의 솔직한 느낌을 전하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혹시나 힘든 일이 있는 건 아닌지 다독이기도 했다. 그제야 K도 봇물 터진 듯 한참을 쉴 새 없이 떠들더니, 무언가 응어리졌던 막힌 감정들이 뻥 뚫렸다고 시원해한다. 씩 웃어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새삼 소통이 주는 효과를 절감하면서 안도했다. 나의 진료실에도 원활한 소통 부재로 생긴 정신적 육체적 불편함을 호소하는 분들이 종종 찾아온다. 배우자와 이별을 하거나 자식들과의 단절로 우울증이 찾아온 노인 환자들,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평생 가족들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들 등. 다양한 환자들을 마주할 때면 K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에게 소통의 약효가 나타나길 기대하며 감정을 풀어낼 수 있게 도와주거나 공감하며 들어주기만 해도,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곤 한다. 그리고 기분이 나아졌다고 편안해하는 환자들을 보면 나 자신도 가슴 한구석이 뚫린 듯 시원해진다.

최근 K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었다. 유명 저널에 자신의 논문을 게재하고, 많은 연구기관으로부터 채용 제의를 받는 중이라고 한다. 수많은 경쟁과 난관을 버텨내고 이겨낸 그의 인내가 결실을 맺는 것 같아 대견하고 기뻤다. 이제 곧 샌프란시스코로 연구실을 옮길 예정인 친구가 또다시 소통의 부재로 힘들어지지 않게 수시로 내 목소리를 전해볼까 한다.

김섬 공중보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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