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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새論새評] 송곳, 그리고 응답하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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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31 01:00:02 크게보기 작게보기 프린트 이메일 보내기 목록
 
 
 
1963년생. 서울대 미학과.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 박사 수료. 중앙대 겸임교수. 카이스트 겸직교수
지친 대중에게 환상 주는 드라마 ‘응팔’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아름다운 과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이상형 제시

‘송곳’ 같은 현실 바꿔야 공동체 부활 가능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 나도 챙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이미 종영한 ‘송곳’과 종영을 앞둔 ‘응답하라 1988’이다. 이 두 작품은 ‘왜 지상파에서는 이런 드라마를 못 만드냐’는 푸념이 나올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호평의 양상은 좀 다르다. ‘응답하라 1988’이 시청률 20%를 넘볼 정도로 시청자들에게 폭넓게 사랑받는 반면, ‘송곳’은 2% 남짓한 낮은 시청률로 소수 마니아층에서만 사랑을 받았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이와 관련하여 우연히 SNS에서 흥미로운 멘션을 주워 읽었다. 어느 트위터 사용자가 어머니에게 “왜 ‘송곳’을 안 보세요? 저게 바로 우리 삶의 얘기인데?”라고 물었더니,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하시더란다. “바로 그래서 안 보는 거야.” 더럽고 치사한 구질구질한 현실은 그러잖아도 현실에서 지겹게 보는데, 왜 텔레비전 앞에 앉아서까지 굳이 그 불쾌한 체험을 반복해야겠느냐는 얘기다.

나는 그 어머니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나 자신도 ‘응답하라 1988’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송곳’을 보고 난 후에는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 앞이 어떤 곳인가? 제대로 ‘여가’를 즐길 여유조차 없는 사회에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위안을 주는 장소가 아닌가. 그런 곳에서 텔레비전이 사회의 비리와 불의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강요한다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는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거기서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가 한 말 때문이다. “독일의 영화는 대중에게 환상을 보여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들은 비루한 현실에 이미 진절머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상파 방송에서 내보내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이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 괴벨스의 영화 철학은 이미 실현됐다. 다만 정치적 방식이 아니라 상업적 방식으로.

‘응답하라 1988’은 물론 위에서 욕한 드라마들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그 드라마도 우리에게 환상을 준다. 내 기억에 따르면, ‘응팔’ 속의 상황은 촌에 살던 사람들이 마을 공동체의 정서를 그대로 들고 막 서울에 올라와 변두리에 모여 살던 1970년대에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이면 이미 ‘그러니까 이웃은 사촌이라 하지요. 멀리 있는 친척도 사촌만은 못 해요’라는 가사가 잘 이해가 안 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응팔’의 환상은 적어도 허황하지는 않다. 그것은 1970년대든, 80년대든 실제로 존재했던 이웃들의 얘기를 꼼꼼한 고증으로 리얼하게 재현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은 드라마의 소품 하나하나에서까지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 과거라고 삶이 아름다웠을 리 없다. 그 시절에도 현실은 더럽고 추했다. 그 과거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응팔’만이 아니다. 추억과 향수의 복고 취향은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는 왜 기꺼이 드라마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가? 간단하다. 눈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앞을 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88년을 덕선이 나이로 보낸 사람들만의 상황이 아니다. 최근 장하성 교수는 “현재의 20, 30대는 해방 이후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못사는 세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3저 호황’을 누리던 시절에는 경제가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였다. 은행 이자가 ‘겨우 17%밖에’ 안 하던 시절에는 누구나 중산층이 될 수 있었다. 지금처럼 모두 아파트에 유폐되어 난방비 때문에 싸우는 것 빼고는 이웃의 얼굴을 볼 일이 없는 시절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그 아파트 평수의 차이로 담까지 쌓아가며 이웃을 차별하는 시대는 더더욱 아니었다.

‘응팔’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이상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과거시제’로 보여준다. 하지만 과거는 돌아올 수가 없다. 설사 돌아온다 하더라도, 우리 추억 속의 그것처럼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응팔’이 보여주는 ‘이웃들 간의 사회적 드라마가 있는 삶’이 부활하려면, ‘송곳’이 보여주는 그 적나라한 현실을 바꿔야 할 게다. 하지만 그 현실은 너무 끔찍해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 송곳에 찔린 듯 고통스럽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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