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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의 근대사] 대마도 정벌은 완전 사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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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9년(세종 1년), 상왕 태종의 주도 아래 단행
험준한 이국의 산야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병사들

대마도 원정군 행로. 이종무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하여 군선 227척과 1만 7천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이 기세 좋게 떠났다.
대마도 원정군 행로. 이종무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하여 군선 227척과 1만 7천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이 기세 좋게 떠났다.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방식은 종종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취사선택하려는 집단적 유혹에 빠지곤 한다. 뼈아픈 패배와 부끄러운 상처는 축소하거나 은폐하고, 부분적인 승리와 영광은 거대하게 부풀린다. 그리고 이를 민족적 자긍심이라는 이름 아래 가둬 하나의 무결한 신화로 박제해 버리는 것이다.

1419년(세종 1년), 상왕 태종의 주도 아래 단행된, 이른바 '대마도 정벌(기해동정)' 역시 우리 역사 인식 속에서 오랫동안 신화의 자리를 차지해 왔다. 교과서와 대중 역사 서술 속에서 이 원정은 해동의 조선 왕조가 남방의 해적(왜구) 소굴을 일거에 평정하고 국위를 만방에 떨친 통쾌한 대승의 상징으로 소비되어 왔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추적해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완전 반대다. 정벌, 대승, 압승이 아니라 참혹한 패배였다. 『조선왕조실록』의 날것 그대로의 기록과 바다 건너의 상반된 사료들을 엄정하게 교차 검증하면 쉽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사학자들은 오랫동안 참혹한 군사적 실책과 지휘 체계의 붕괴, 험준한 이국의 산야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을 외면한 채 '정벌'로 도배질을 해 왔다.

대마도 정벌 상상도.
대마도 정벌 상상도. '대마도 정벌'로 알려진 사건은 알고 보면 조선군의 참혹한 패전이었다. 한국의 국사학자들이 이 비참한 패전을 대승이니 압승이니 거둔 것으로 분칠을 해 놓았다.

◆조선 초 왜구의 준동

당시 조선을 둘러싼 해양 안보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왜구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듯 해안가 촌락을 털고 달아나는 좀도둑 무리가 아니었다. 왜구는 일본 남북조 내란기를 거치며 생존 기반을 잃은 하급 무사들이 주축이었다. 여기에 명나라 밀수 선단의 병사들, 고려·조선의 탈영병까지 뒤섞인 수만 명 규모의 다국적 무장 해적 집단이었다.

이들은 조운선을 탈취하여 국가 재정의 혈맥을 끊었고, 해안선 수십 리 안쪽을 초토화하며 백성들을 납치해 동남아 일대에 노예로 팔아넘겼다. 조선 조정은 울릉도 등지의 섬을 비우는 공도(空島) 정책과 해안선 농경지를 폐쇄하는 극단적인 청야 전술로 맞섰다. 이런 정책은 바다를 외면하고 대양의 통제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구조적 악순환을 낳았을 뿐이다.

이러한 위기 국면에서 1419년 5월, 왜구 함선 50여 척이 충청도 비인 현을 기습했다. 그들은 군선을 불태우고 황해도 해주와 연평도 일대를 유린했다. 그 후 중국 발해만 방면으로 북상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들 세종에게 왕권을 넘기고 군사권만 틀어쥐고 있던 상왕 태종은 분노했다. 군사전문가였던 상왕 태종은 왜구의 주력 부대가 약탈을 위해 북쪽으로 출정하여 본거지가 비어 있는 순간을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상왕 태종은 빈집을 털듯 대마도 본거지를 기습 소탕하겠다는 야심 찬 기획 아래, 군선 227척과 1만 7천여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결성했다. 이것은 조선 왕조 500년을 통틀어 오직 자국의 독자적 결단과 기획에 의해 바다를 건너 타국 영토를 침공한 유일무이한 해외 군사 원정이었다.

음력 6월 20일, 이종무가 이끄는 원정 함대는 대마도 아소 만에 진입했다. 원정군은 포구에 정박해 있던 왜선 129척을 나포 및 소각하고 해안가의 가옥 1천900여 채를 불태우며 초반 기선을 제압했다.

전투 지휘관 박실은 상륙한 조선군이 왜구에게 기습 당하자 부하들 팽개치고 적전 도주하는 바람에 후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전투 지휘관 박실은 상륙한 조선군이 왜구에게 기습 당하자 부하들 팽개치고 적전 도주하는 바람에 후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상륙한 조선군, 궤멸적 참패

대마도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를 비롯한 대마도 주민들이 산중으로 도주하자, 조선군은 초기 성과에 도취되어 승리를 낙관했다. 그러나 전황은 상륙 작전이 본격화되면서 궤멸적인 반전으로 치달았다.

음력 6월 26일, 좌군 절제사 박실이 이끄는 부대가 왜구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내륙의 험준한 산악 지대로 진격했다. 그러나 대마도 지형은 좁은 협곡과 가파른 암벽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였다. 지형 숙지도 없이 무모하게 산길 깊숙이 들어선 조선군은, 고지대에 매복해 있던 왜구들의 기습적인 포위 공격에 직면했다. 일본 사료에서 이른바 '누카다케(糠岳) 전투'로 기록된 이 격전의 참상은 참혹했다.

화살과 바위가 빗발치는 협곡 속에서 지휘 체계가 순식간에 붕괴하였다. 충청·전라·경상 삼도에서 차출된 최정예 무관이자, 수백 명의 병력을 이끌던 대대장급(편장·偏將) 7명이 현장에서 일시에 전사했다. 편장 7인의 동시 전사는 야전 지휘부의 붕괴를 의미했다.

설상가상으로 군을 수습해야 할 지휘관 박실은 부하들을 내팽개치고 가장 먼저 배로 달아났다. 퇴로가 끊기고 지휘 체계가 붕괴한 채 방치된 병사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가파른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져 추락사하거나 아소 만의 깊은 바다에 빠져 익사했다.

『세종실록』은 이날의 패배를 장교 7명과 병사 180여 명의 전사로 축약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대마도 소(宗)씨 가문의 공식 기록인 『종씨가보(宗氏家譜)』와 일본 측 사료들은 전사한 조선군이 2천500명에서 3천명 이상에 달했다고 증언한다. 실록의 숫자가 군 상층부의 체면을 위해 은폐된 것이든, 일본 측 기록이 전과를 과장한 것이든, 분명한 사실은 조선군 최정예 부대가 복병에 걸려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는 점이다.

패전의 충격 속에서 총사령관 이종무는 기상 악화와 태풍을 구실로 삼아 출병 채 보름도 되지 않은 7월 초, 함대를 거제도로 서둘러 회군시켰다.

이 원정이 과연 우리가 기억해 온 '정벌'이었는지는 회군 직후 조선 조정에서 벌어진 처벌 과정을 통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만약 왜구를 토벌하고 개선한 장수들이었다면 성대한 승전보와 함께 논공행상이 뒤따라야 마땅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관들은 군령을 어기고 병사들을 무참히 죽게 만든 장수들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며 연일 탄핵을 쏟아냈다.

원정군 사령관 이종무. 그는 비참한 패전을 기록한 덕분에 귀국 후 유배형에 처해 졌다.
원정군 사령관 이종무. 그는 비참한 패전을 기록한 덕분에 귀국 후 유배형에 처해 졌다.

◆원정군 총사령관·지휘관 유배형에 처해

그 결과 총사령관 이종무는 모든 관직과 훈작을 삭탈당한 채 경상도 창원으로 유배되었다. 적전 도주한 박실은 의금부에 하옥되어 모진 국문을 받은 뒤 비인 현의 노비로 전락할 뻔한 위기 속에서 유배형에 처해졌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해 가을, 원정에서 돌아온 왜구들이 복수를 위해 재침략을 준비한다는 첩보가 전해졌다. 조정은 제2차 정벌을 논의했다. 그러나 1차 원정의 생지옥을 목격했던 병사들은 공포에 휩싸여 집단 탈영을 감행했다. 병조판서가 "무식한 백성들이 군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치니 엄벌해야 한다"라고 탄식할 정도로 군 기강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결국 2차 정벌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무산되었다. 조선은 대마도 도주가 보내온 형식적인 복종 서한과 타협했다. 무역 특혜와 식량을 제공하는 선에서 사태를 봉합한 것이다. 군사적 결판이 아니라 외교적 미봉책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 역사 500년을 통틀어 자발적인 판단에 의해 군사력을 한반도 밖으로 투사한 최초의 전투는 이처럼 비참한 결말로 끝맺었다. 광해군 시절 강홍립 이하 1만여 명의 병력을 만주에 파병하여 누르하치 군과 싸운 사르후 전투는 조선군의 비참한 패전으로 끝났다. 효종 시절 두 차례 조선 조총수를 만주에 파병하여 전투를 벌인 사건은 우리 역사에서는 나선정벌로 기록되었다. 이때의 파병은 조선 정부 자의에 의한 파병이 아니라, 청나라에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파병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엉망진창으로 패전하여 도망 나온 대마도 침공을 뻥튀겨 마치 장엄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분칠을 해놓은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 역사의 제 모습을 찾아야 한다. 패배의 상처를 승전의 환각으로 둔갑시키는 것은 후대에게 '정신 승리'를 강요하는 사기극이나 다름없다. 뼈아픈 실책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왜 패배했는지를 복기하는 지성을 갖춘 민족만이 뼈아픈 기록 위에서 현실을 냉정하게 헤쳐 나갈 안보적 지혜를 구축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펜앤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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