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를 사는 사람은 이제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그 차 배터리를 누가, 어느 나라에서, 언제 만들었는지 볼 수 있다. 국토교통부가 자동차등록규칙을 고쳐 6월부터 배터리 제조사와 생산국을 계약 단계에서 알리도록 했기 때문이다. 6월 말 기준 국내 전기차는 109만 5218대로, 지난해 말보다 20만대 가까이 늘었다.
◆ 계약서 특약란에 적히는 10가지
판매사가 구매자에게 반드시 알려야 하는 배터리 정보는 10종이다. 배터리 용량과 정격전압, 최고출력 같은 기본 제원에 셀 제조사와 형태, 주요 원료가 먼저 더해졌고, 올해 개정으로 배터리 제조사와 생산국가, 제조연월, 제품명과 관리번호가 추가됐다.
이 정보는 매매계약서와 판매사 홈페이지, 차량 인수증에 함께 들어간다. 신차 계약서 특약란에 셀 제조사와 형태, 양극재 원료가 인쇄돼 서명 전에 읽을 수 있다. 자동차등록증 서식에도 같은 항목이 들어가 중고차를 살 때도 확인된다.
정보를 빼먹거나 거짓으로 적으면 과태료가 붙는다. 상한은 기존 50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올랐다. 1회 위반이면 200만원, 2회면 500만원, 세 번째부터는 상한이 그대로 적용된다. 국토교통부는 이번 전기차 배터리 정보 공개 개정이 배터리 투명성을 높이고 안전 관리를 체계화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 청라 화재가 바꾼 것
제도의 출발점은 2024년 8월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 화재다. 벤츠 EQE 한 대에서 시작된 불로 차량 87대가 전소되고 783대가 피해를 입었다. 사고 당시 이 차에 어느 회사 배터리가 들어갔는지 바로 확인되지 않아 혼선이 빚어졌다.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가 뒤늦게 차종별 셀 제조사를 공개하자 EQE 세단 등에 중국 파라시스와 CATL 배터리가 들어간 사실이 드러났고, 차주들의 집단소송과 검증 요구로 이어졌다.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전 차종의 배터리 제조사를 홈페이지에 먼저 올렸다. 법이 따라오기 전에 시장이 먼저 움직인 셈이다.
2024년 국정감사 때 국회 국토교통위원회에 제출된 자료를 보면 당시 등록 전기차의 절반이 SK온 배터리를 달고 있었다. CATL과 BYD 등 중국산은 여섯 대 중 한 대꼴이었다.
◆ 화재는 늘었지만, 비율은 내연차보다 낮다
소방청이 국정감사를 앞두고 지난달 30일 국회에 낸 자료를 보면 전기차 화재는 2021년 24건에서 지난해 98건으로 네 배 넘게 늘었다. 전체 자동차 화재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몫도 5년 새 다섯 배 이상 커졌다. 재산피해액은 2024년 55억원을 넘어 4년 전의 열다섯 배가 됐다.
다만 차가 늘어난 속도를 감안하면 그림이 달라진다. 2024년 기준 10만대당 화재는 전기차 11.89건, 내연기관차 14.95건으로 전기차가 20% 정도 적다. 5년 누적으로 1만대당을 따져도 두 차종은 거의 같다.
문제는 불이 나는 장소다. 소방청의 2024년 분석에서 최근 3년 전기차 화재 139건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주차 중이거나 충전 중에 났다. 달리다 나는 불보다 지하주차장에서 조용히 시작되는 불이 더 많다는 뜻이고, 청라 사고가 공포로 번진 이유이기도 하다.
◆ 제조사 이름이 안전 등급은 아니다
그렇다면 국산 배터리를 고르면 안전할까. 2024년 국정감사 때 제출된 한국교통안전공단 자동차안전연구원 자료를 보면 2018년부터 2024년 8월까지 전기차 화재 139건 중 126건이 국내 3사 배터리에서 났다. 국산 점유율이 압도적으로 높으니 당연한 결과이지, 특정 브랜드가 위험하다는 증거는 아니다.
전문가들의 지적도 여기에 모인다. 한 대학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셀 제조사 이름만으로는 불량 셀이나 열폭주 위험을 근본적으로 막기 어렵다고 본다. 같은 셀이라도 팩을 어떻게 짜고, 배터리관리시스템이 셀 사이 편차와 내부 단락을 어떻게 감시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갈린다는 것이다.
또 다른 대학 교수는 "BMS가 화재로 인해 불타버리게 될 경우 원인 불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 BMS 공개 의무화를 통해 그런 문제를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완성차 업계는 BMS 알고리즘과 충전 제어 데이터를 영업비밀로 보고 개방에 소극적이다.
◆ 인증제와 이력제, 제조사 뒤에 붙는 숫자
소비자가 제조사 이름 다음으로 볼 것은 정부 인증이다. 지난해 2월부터 국토교통부가 배터리 안전성을 직접 시험해 인증한다. 진동과 열충격, 연소, 과충전 등 12개 항목을 통과해야 하고, 인증을 받았어도 3년마다 생산지 단위로 사후 검사를 다시 받는다.
인증이 영원하지도 않다. 올해 개정으로 설계·제조 결함 때문에 같은 원인의 화재가 2년 안에 두 번 나면 인증이 취소되고 판매가 중지된다. 제조사 이름이 계약서에 적히는 만큼 책임도 이름을 따라간다.
6월부터는 새 배터리마다 24자리 이하 식별번호가 붙어 자동차등록원부에 기록된다. 어느 차에 어느 배터리가 들어가 몇 년을 달렸는지 전 주기 이력이 남는다.
◆ 남은 일정
이력이 쌓이면 그 다음은 재활용이다. 사용후 배터리 재생원료 인증과 탈거 전 잔존가치 성능평가는 내년 1월부터 단계적으로 넓어진다. 배터리 전 주기 이력을 한곳에서 추적하는 정부 통합시스템은 내년 말 구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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