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IRP 계좌에 넣어 둔 해외주식형 ETF가 마이너스라도, 팔지 않고 증권사 계좌로 그대로 옮길 수 있다. 2024년 10월 말 시작한 퇴직연금 실물이전이 그 길을 열었다. 이 제도로 올해 6월 말까지 금융사를 갈아탄 퇴직연금은 15조8699억원이다.
1년 8개월 동안 하루 평균 261억원, 400건 넘는 이전이 이뤄졌다. 돈의 방향은 한쪽으로 쏠렸다. 은행을 떠나 증권사로 간 돈이 가장 많았다.
◆ 팔지 않고 옮긴다
실물이전이 생기기 전에는 퇴직연금 금융사를 바꾸려면 보유 상품을 전부 팔아 현금으로 만들어야 했다. 손실 중인 펀드라면 그 순간 손실이 확정됐다. 새 금융사에서 다시 사려면 매수 시점도 새로 잡아야 했다.
실물이전은 펀드·ETF·예금을 보유한 상태 그대로 새 금융사 계좌에 넘긴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은 2024년 10월 37개 금융사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 전체 적립금의 열에 아홉이 넘는 금액이 대상에 들어갔다.
◆ 은행에서 증권사로, 5조원
은행에서 증권사로 넘어간 퇴직연금은 5조2225억원으로 전체 이전액의 3분의 1이다. 거꾸로 증권사에서 은행으로 간 돈은 그 4분의 1에 그쳤다. 은행끼리 오간 돈도 4조원대로 적지 않았다.
권역별로 따지면 증권사는 4조원 넘게 순유입됐고, 은행은 비슷한 규모가 순유출됐다. 보험권도 소폭 빠져나갔다. 속도도 붙고 있다. 올해 상반기 이전액은 6조9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의 두 배가 넘는다.
판도도 조금씩 바뀐다.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은 2분기 말 553조9000억원까지 불었다. 이 가운데 은행 점유율은 절반을 겨우 넘기는 수준으로 내려왔고, 증권사는 열에 셋에 가까워졌다.
◆ IRP가 이동의 중심
제도별로는 개인형 IRP 이전액이 6조7695억원으로 가장 많다. 회사가 운영하는 DC형과 DB형은 각각 4조원대다. 증권사로 흘러든 돈의 대부분은 IRP와 DC형에서 나왔다.
IRP에서만 증권사로 3조원 넘게 순유입됐고, 은행 IRP에서는 2조원대 후반이 빠져나갔다. DC형도 증권사 쪽으로 2조원 가까이 들어왔다. 반대로 회사가 운용 책임을 지는 DB형은 증권사에서 9000억원 가까이 순유출됐다. 원리금보장 상품을 선호하는 DB형과, 실적배당 상품을 찾아 ETF를 실시간으로 사고파는 개인의 선택이 갈린 결과다.
◆ 수수료 0원 셈법
퇴직연금 가입자가 금융사에 내는 수수료는 2025년 기준 연간 2조원을 넘었다. 주요 증권사는 모바일로 개설한 비대면 다이렉트 IRP에 운용관리·자산관리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 적립금이 클수록 해마다 벌어지는 차이가 커진다.
은행 IRP에서 손실 중인 채권형 ETF를 가진 가입자가 매도 없이 수수료 무료 증권사 IRP로 옮기는 경우가 전형적인 경로다. 손실을 확정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낼 수수료를 줄이는 셈법이다. 면제 범위는 증권사별 약관에 따른다.
◆ 옮기기 전 사전조회
갈아타기에는 벽도 있다. 받는 쪽 금융사가 내가 가진 펀드나 ETF를 취급하지 않으면 그 상품은 실물이전이 안 된다. 팔아서 현금으로 옮겨야 하고, 그 순간 손실이 확정된다.
디폴트옵션으로 운용 중인 자산과 보험계약 형태 적립금은 아예 대상이 아니다. 서비스 개시 당시 전체 적립금의 16.5%였다. 리츠, 환매중단펀드, MMF, 퇴직연금 전용 ELS도 전산 호환 문제로 빠져 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7월 사전조회 서비스를 열어, 옮기기 전에 어떤 상품이 넘어가고 어떤 상품이 막히는지 미리 볼 수 있게 했다.
또 하나는 같은 제도끼리만 옮길 수 있다는 점이다. DC형은 DC형으로, IRP는 IRP로만 간다. 회사 DC형에 든 직장인이 다른 금융사 IRP로 바로 가려면 중도인출 요건을 채우거나 해지 절차를 밟아야 한다.
◆ DC에서 타사 IRP로, 전산 개발 시작
이 벽을 허무는 작업이 시작됐다. 금융감독원과 예탁결제원 등 17개 기관은 지난 8월 실물이전 개선 TF 첫 회의를 열고, DC형에서 다른 금융사 IRP로 직접 옮기는 제도 개선에 착수했다.
TF는 이달 DC형에서 타사 IRP로 직행하는 전산 개발을 시작한다. 세부 기준은 올 하반기 안에 마련하고, 연말 도입을 목표로 한다. 환매중단펀드까지 옮길 수 있게 하는 전산은 내년에 구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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