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태국, 중국의 소녀들이 한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춘다. 서로 다른 국적과 언어, 문화적 배경을 지녔지만 호흡은 한데 모여 어우러진다.
지난 13일 데뷔한 9인조 걸그룹 A2O LITE(에이투오 라이트) 얘기다.
SM엔터테인먼트 설립자이기도 한 이수만 A2O엔터테인먼트 키 프로듀서가 선보인 이 그룹은 데뷔곡 'NEON'(니온, 또는 네온)으로 발매 약 29시간 만에 국내 음원 플랫폼 멜론 TOP100 정상에 오르며 화려하게 출발했다.
그런데 이 그룹의 멤버 구성을 바라보면 음원 순위와는 조금 다른 상상도 가능하다.
A2O LITE가 언젠가 동아시아 평화와 교류를 상징하는 아이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NEON' 네 글자에 담아보는 동아시아의 미래
먼저 데뷔곡 'NEON'이라는 이름부터 살펴보자.
'네온'은 빛을 연상시키는 단어다. 실제 작명 의도와는 별개로, 알파벳 네 글자에 동아시아의 미래를 향한 희망을 담아봤다.
▷N—No War : 전쟁 없는 동아시아
▷E—East Asia :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
▷O—One Peace : 하나의 평화
▷N—New Future : 새로운 미래
이를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하면 "전쟁 없는 동아시아, 하나의 평화로 새로운 미래를"이라는 메시지가 완성된다.
물론 이는 A2O LITE의 공식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데뷔곡 제목을 동아시아 평화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한 일종의 알파벳 4행시다.
A2O LITE에는 한국인 3명, 중국인 3명, 일본인 1명, 태국인 1명, 미국·일본 이중국적자 1명이 있다. 이러한 구성은 요즘 국제외교 무대에서 익숙하게 접하는 한중일 정상회의와 ASEAN+3(아세안+한중일)를 연상시킨다.
각국 정부가 외교 현안 하나를 놓고 좀처럼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동안, 이들은 이미 하나의 노래에 맞춰 춤추고 있다는 게 상징적이다. 국가 수장들도 못하는 걸 어린 소녀들이 해낸다.
◆블랙핑크·에스파·아이브·베이비몬스터부터 NCT까지…이미 시작된 민간외교
그렇다고 이러한 가능성을 A2O LITE만의 특별한 장점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이미 K팝 무대에는 여러 국적의 아티스트가 함께 활동하며 국가 간 문화적 거리를 좁혀온 사례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계적인 걸그룹 블랙핑크다. 한국 출신 지수·제니, 한국·뉴질랜드 복수국적의 로제, 태국 출신 리사가 함께 활동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히 아시아 각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콘서트를 개최하며 국경을 뛰어넘는 K팝의 영향력을 보여줬다.
걸그룹 에스파에는 중국 출신 닝닝과 일본 출신 지젤이 있고, 아이브에는 일본 출신 레이가 있다. 리센느에도 일본 출신 미나미가 활동한다.
블랙핑크의 소속사 후배인 베이비몬스터는 한국·일본·태국 출신 멤버들로 구성돼 있어 실은 A2O LITE보다 앞서 동아시아를 고루게 아우르는 다국적 구성을 선보였다. 이들은 2025년 첫 월드투어를 통해 일본 여러 도시와 싱가포르, 홍콩, 방콕 등 아시아 곳곳을 찾았다.
여기에 SM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하츠투하츠(Hearts2Hearts)도 주목할 만하다. 2025년 데뷔한 이 그룹에는 인도네시아 출신 카르멘이 활동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 최초의 인도네시아 출신 아이돌이다.
특히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8000만명이 넘는 세계 4위 인구 대국이자 동남아시아 최대 경제 규모를 지닌 나라다. 카르멘의 등장은 K팝의 외국인 멤버 구성이 중국·일본과 태국 등을 넘어 거대한 인도네시아 시장과 더욱 긴밀히 연결되는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인도네시아가 단순히 K팝을 소비하는 시장을 넘어 스타를 배출하는 무대로도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보이그룹도 마찬가지다.
한국과 일본 출신 멤버들이 함께하는 NCT WISH는 서울을 시작으로 마카오, 마닐라, 홍콩, 싱가포르, 자카르타, 방콕 등을 잇는 아시아 투어를 진행했다.
중국과 태국 출신 멤버들이 활동하는 WayV 역시 한국과 중국, 일본, 태국 등 아시아 각국을 무대로 공연해왔다. 한국과 일본 출신 멤버들이 함께하는 ENHYPEN과 &TEAM도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의 활동을 하나로 묶어보면 민간 외교의 꽤 업그레이드 된 장면이 그려진다. 각국 정부가 외교관을 파견하는 동안, 아이돌 그룹은 비행기를 타고 해외 공연장을 찾는다. 공연장에서는 한국어와 일본어, 중국어와 태국어 등이 오가고, 국적이 다른 팬들은 같은 노래를 따라 부른다. 정부가 임명한 외교사절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민간외교의 역할을 임팩트 있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K팝이 세계적인 문화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일본과 중국, 동남아시아 시장이 중요한 토대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방탄소년단은 유엔에 섰다…다음 주인공은 누구?
이러한 K팝의 문화적 영향력이 실제 국제외교 무대로 연결된 대표적인 사례가 방탄소년단(BTS)이다.
방탄소년단은 2018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청년 세대를 향한 메시지를 전했고, 2021년에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미래세대와 문화를 위한 대통령 특별사절'로 임명돼 유엔총회 관련 행사에 다시 섰다. 당시 방탄소년단은 지속가능발전목표(SDG) 행사에서 연설하고 'Permission to Dance' 공연 영상도 선보였다. 아이돌 그룹이 단순한 축하공연 출연자를 넘어 국제사회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주체가 된 것이다.
물론 이제 막 데뷔한 A2O LITE를 방탄소년단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다른 K팝 그룹들 역시 활동 규모와 국제적 인지도에는 각기 차이가 있다. 아직은 방탄소년단이 멀리 롤모델이다.
다만, 방탄소년단이 보여준 선례를 생각하면, 앞으로 동아시아의 문화교류와 평화를 상징하는 K팝 아이돌이 등장할 가능성도 충분히 상상해볼 만하다. K팝 아이돌의 영향력이 그렇게 지속될 가능성도 충분히 전망할 수 있다.
◆한중일 정상회의에 K팝 아이돌이 등장한다면?
가령 한국에서 한중일 정상회의가 개최된다고 가정하자. 정상들은 회담장에서 경제·안보 현안을 논의하고, 행사장 밖에서는 청년문화 교류 프로그램이 열린다. 그 무대에 A2O LITE나 에스파, 아이브, 베이비몬스터, NCT WISH 같은 그룹이 등장한다면 어떨까.
한국과 중국, 일본, 태국 등의 멤버들이 함께 노래하고, 여러 나라 팬들이 환호한다. ASEAN+3 정상회의와 연계된 문화행사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상상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축하공연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룹의 다국적 구성과 공연을 즐기는 팬들 자체가 행사에서 강조하려는 '교류'와 '공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정상회의의 공식 마스코트로 지정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청년교류 행사나 공동 관광캠페인, 문화산업 프로젝트의 홍보대사라면 충분히 현실적인 구상이다. 무엇보다 K팝 아이돌들은 이미 해외 투어와 팬미팅 등을 통해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앞세우는 건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지 않고도 K팝 아이돌들은 서로 다른 나라의 젊은이들을 한 공간으로 불러 모으는 어떤 '초능력'을 갖고 있다.
◆평화를 선언하는 정상들, 평화를 노래하는 아이돌
물론 대중음악만으로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적 갈등이나 안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따라서 아이돌 그룹에 거창한 정치적 책임을 지워서도 안 된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음악이고, 공연은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나라 출신의 멤버들이 함께 활동하고, 국경을 넘어 수많은 팬이 같은 음악을 즐긴다는 사실 자체는 의미가 있다. 외교가 국가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이라면, 대중문화는 서로를 친숙하게 만드는 일이다. 여기서 정치적 평화와는 또 다른 '문화적 평화'가 싹틀 수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강조했던 바로 그 문화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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