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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의 근대사] 자유주의는 아무 곳에서나 꽃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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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적 토대'·'제도적 국가 역량' 전제돼야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열매 위한 토양 준비 시기

영국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달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영국에서 모든 성인 남녀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시기는 1928년이다.
영국에서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달라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영국에서 모든 성인 남녀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시기는 1928년이다.

최근 영화 <암살자(들)>의 제목을 차용하여 현대사의 세 지도자(이승만·박정희·전두환)를 단죄하는 『독재자(들)』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한국 현대사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이런 류의 책들이 제기하는 핵심 이슈는 개발연대의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인권을 무시하고 헌법을 짓밟았으며, 독재를 감행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는 두 가지 치명적 오류가 숨어 있다. 첫째는, 서구 선진국들도 수백 년 걸렸던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안착 과정을 이제 갓 식민지에서 독립한 신생국에 억지로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자유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여러 가지 필요충분조건들이 갖춰져야만 하는데, 이 점을 은폐하고 있다는 점이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란 저서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 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이 갖춰진 사회가 열린 사회이며 민주주의"라고 정의했다. 서구 선진국들이 포퍼가 말한 '평화적 정권 교체'와 성별·계급·인종 차별 없는 온전한 보통 선거권을 확립한 시점은 17~18세기 명예혁명이나 미국 독립, 프랑스 혁명기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원형 국가인 영국에서 성인 남녀 모두에게 차별 없이 1인 1표 투표권이 주어진 시기는 1928년이었다. 미국은 1920년 여성에게 참정권을 줬으나 흑인에게까지 차별 없이 투표권이 주어진 시기는 1965년이었다. 프랑스는 1944년 여성에게 참정권이 인정되어 1945년 처음 행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 독일은 1949년 서독 기본법 제정과 총선을 통해 입헌적 자유민주 질서가 구축되었다. 스위스의 경우, 연방 차원에서 여성 참정권이 허용된 것은 1971년에 이르러서였다.

이처럼 서구 선진국조차 최소 200~300년 유혈 혁명과 내전, 파시즘과 두 차례의 참혹한 세계대전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와 시장경제'라는 뿌리가 내려졌다.

한국은 어떤가. 1945년 8월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3년여 미군정을 거쳤다. 1948년 8월 건국된 지 2년 후 미증유의 전쟁을 겪으며 전 국토의 80%가 초토화되었다. 1인당 국민소득 60달러 내외의 절대빈곤과 폐허, 북한의 대남 무력도발에 시달리는 신생국에서 "왜 건국 초부터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온전히 구가하지 못했느냐"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시대착오적 폭력이다.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투표소에 줄을 선 유권자. 한국은 첫 선거에서부터 모든 성인 남녀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1948년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투표소에 줄을 선 유권자. 한국은 첫 선거에서부터 모든 성인 남녀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민주주의는 아무 곳에서나 꽃피지 않는다

근대화 이론이나 민주주의 연구의 석학들은 자유민주주의는 아무 곳에서나 무작위로 작동하는 제도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즉, 자유민주주의가 정상 작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정한 수준의 '사회경제적 토대'와 '제도적 국가 역량'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엄중한 연구와 통계, 사료를 통해 밝혀냈다.

정치학의 거두 시모어 마틴 립셋은 "경제 발전과 두터운 중산층 형성 없이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는 자생할 수 없다"라는 근대화 이론을 세운 학자다. 민주주의는 도덕적 선언이나 이념적 열망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생산력과 사회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선행되어야만 안착할 수 있는 제도적 상부구조라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증명해 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립셋의 가설'이다.

정치학자 아담 프셰보르스키와 페르난도 리몬지는 1950~1990까지 135개국 데이터를 정밀 분석하여 립셋의 가설이 사실임을 증명해 냈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가난한 나라에서도 독재자 사망, 외적 충격으로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는 있다. 하지만, 1인당 소득이 낮은 국가에서 시작된 민주주의는 예외 없이 경제난과 쿠데타로 무너졌다. 프셰보르스키 연구에 따르면, 1인당 GDP가 당시 구매력 기준 6천 달러 이상에 도달한 민주 국가는 세계사에서 단 한 번도 독재로 회귀하지 않았다.

파리드 자카리아는 국민의 빈곤을 퇴치하고 사법부 독립과 재산권 등 법치주의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선거만 치르면, 거의 100% 확률로 독재자나 선동가가 권력을 장악하는 '비자유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로 전락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경제적 번영과 법치적 기반이 먼저 다져져야 비로소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성숙한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해 낸 학자로 유명하다.

민주주의의 석학(碩學)으로 평가받는 로버트 달도 "준비되지 않은 가난한 토양에 성급히 이식된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포퓰리즘·내전·독재의 파멸로 귀결된다"라고 설파했다. 이것이 그가 20세기 신생국들을 연구한 결과 내린 섬뜩한 결론이다.

'정치 발전의 올바른 순서'를 주창한 학자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다. 그는 건전한 근대 국가가 작동하기 위한 3대 요소로 ①강력하고 유능한 국가기구(관료제·치안·인프라), ②재산권 보장과 권력을 제한하는 법치, ③정기 선거를 통한 민주적 책임성을 꼽았다. 후쿠야마는 ①과 ②가 정착되기 전에 ③을 먼저 도입하면, 국가는 포퓰리즘, 부패, 종족 갈등의 지옥으로 추락한다고 경고했다. 아프리카·중동·남미에서의 자유민주주의 실패는 바로 이 '순서의 역전'이 낳은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는 동아시아국가인 한국·대만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성공한 이유는 국가기구와 법적 질서, 경제적 번영을 먼저 닦은 후 민주화를 안착시킨 덕분이라고 설파했다. 이런 연구를 통해 후쿠야마는 "물적 토대와 국가 역량 없이 급진적으로 도입된 민주주의는 축복이 아니라 국가를 파멸로 이끄는 독약"이라는 사실을 준엄하게 경고했다.

새뮤얼 헌팅턴도 『변화하는 사회에서의 정치질서』에서 '물질적 토대 없는 급진적 민주화의 위험'을 경고했다. 그는 갓 독립한 신생국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즉각적 흉내'가 아니라,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경제를 일으킬 수 있는 강력한 국가 권위와 행정 통제력"이라고 주장했다. 질서와 성장을 먼저 확보한 후 점진적으로 민주화를 수용한 한국식 개발독재가 최선의 현실적 모델임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학자가 헌팅턴이다.

시모어 마틴 립셋은
시모어 마틴 립셋은 "경제 발전과 두터운 중산층 형성 없이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는 자생할 수 없다"라는 근대화 이론을 세운 학자다.

◆엄격한 조건 갖춰져야 민주주의 정상 작동

이런 학자들의 분석 틀을 한국에 대입하면 좌파 진영의 이승만·박정희 폄훼는 이론적 무지를 바탕으로 한 선전 선동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948년 한국은 립셋이나 로버트 달이 경고한 "경제 토대 없는 상황에서 급진적 민주주의 도입"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만약 1인당 소득 60달러의 극빈 상황에서 한국이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를 도입했다면 대지주 과두제와 빈곤을 해결하지 못해 중남미형 독재로 추락했을 것이다.

박정희의 포항제철 기공식 장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상 작동하기 위한 물적 토대를 건설하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를
박정희의 포항제철 기공식 장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는 자유민주주의가 정상 작동하기 위한 물적 토대를 건설하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를 '독재의 시대'로 비판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반면 한국은 이승만 시기에 열정적인 농지개혁과 문맹 퇴치, 인재 양성에 주력했다. 박정희 시기에 경부고속도로·제철·조선·중화학공업을 육성했으며(제1의 성장동력), 전두환 시기에 IT산업(제2의 성장동력), 원자력 국산화(제3의 성장동력), 물가 안정과 3저 호황으로 물적 토대 건설에 성공했다. 탄탄한 중산층과 고학력 시민을 배양해 낸 후인 1987년 6·29 선언을 통해 민주화로 이행한 덕분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고히 성공할 수 있었다.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는 도덕적 구호나 이념의 촛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산업화·근대화로 창출된 두터운 중산층과 고등 교육의 토대 위에서만 작동하는 신비로운 제도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시대는 밭을 갈고 거름 주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열매 맺기 위한 토양을 준비한 시기였다. 그런 과도기의 지도자들을 향해 "독재자" 운운하는 비난은 현대 정치학의 기본 원리조차 무지한 사람들의 패륜 행위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펜앤마이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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