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천(1768~1801)이 자신의 모습을 부채에 그리게 한 선면 초상화다. 부채엔 온갖 그림이 다 들어갔지만 초상화가 휴대하는 소지품인 부채에 그려진 것은 초상미술의 역사에서 흔치 않은 일이다. 불과 18세 때여서 초상화를 그리기엔 어린 나이였으나 할아버지 강세황(1713~1791)이 부채에 초상을 그린 행적을 계승하려는 의도와 함께 자존감 또한 남달랐기 때문일 것 같다.
강이천은 태어날 때 한쪽 눈을 실명한 장애가 있었으나 신동으로 소문났다. 12세에 부름을 받아 궁에 들어가 시를 지어 올려 정조로부터 '진학사(眞學士)'가 될 것이라는 격려를 받았다. 서울의 생활상을 106수의 시로 지은 '한경사(漢京詞)'가 유명하다. 당시의 수집가 석농 김광국(1727-1797)은 강이천의 묵죽 한 점을 자신의 컬렉션에 넣으며 이렇게 기록했다.
"강이천은 표암 강세황의 손자로 어릴 적부터 문장을 잘 지어 이름이 났고, 일찍이 어린 아이 때 입시해 정조임금의 칭찬을 크게 받았다. 근래 그린 대나무 그림을 보니 매우 빼어난 운치가 있다. 쉼 없이 그려나간다면 동파(소식)와 양주(문동)의 경지도 도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눈을 비비며 기다릴 것이다(吾且拭目以待之)."
김광국은 강이천의 '빼어난 운치', 일운(逸韻)을 알아보았기에 아직은 미숙한 작품을 수집하며 그의 재능이라면 묵죽의 원조인 중국 송나라 소식(蘇軾)과 문동(文同)에 버금가리라며 그런 날을 "눈을 비비며 기다릴 것"이라고 했다.
김광국은 꼼꼼하고 세심하게 화가와 장르를 빠트리지 않은 미술사적 수집을 했고, 모은 그림 하나하나에 화평(畵評)을 남긴 한국미술사의 위대한 공헌자다. 2015년 번역돼 나온 '김광국의 석농화원(石農畵苑)'을 읽으며 미술을 대하는 그의 애정 어린 마음을 곳곳에서 느꼈다.
명민한 강이천은 서학(천주교)에 발을 들여놓았고 1801년 옥중에서 숨진다. 34세의 안타까운 나이였다. 희귀하게도 할아버지와 손자가 나란히 선면 초상화를 남겼다. 조상님 얼굴이 들어 있어 후손들은 두 자루의 부채까지 고스란히 소중하게 보존했다. 240년 전 실물 부채가 남아 있는 드문 예다.
대구의 미술사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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