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이사철이다. 보증금만 챙겨 나오면 끝이 아니다. 아파트에 2년을 산 세입자라면 관리비 고지서에 매달 찍혀 있던 '장기수선충당금' 항목을 다시 봐야 한다. 법은 이 돈을 집주인이 돌려주도록 정해 놓았다. 그러나 바로 아래 줄의 '수선유지비'는 한 푼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름이 비슷해 헷갈리지만 둘의 차이는 수십만원이다.
◆ 전국에 11조원…집주인 몫인데 세입자가 낸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조인철 의원실이 지난 7일 공개한 국토교통부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전국 공동주택 장기수선충당금 적립액은 올해 6월 기준 11조1680억원에 달했다. 승강기 교체, 외벽 도색, 배관 교체처럼 아파트의 큰 공사에 쓰려고 미리 모아 두는 돈이다.
공동주택관리법은 300세대 이상이거나 승강기가 있거나 중앙·지역난방을 쓰는 단지에 이 돈을 의무적으로 쌓게 한다. 적립하지 않은 소유자에게는 과태료 300만원을 물린다.
부담 주체는 집주인이다. 아파트의 가치를 지키는 돈이어서다. 그런데 관리비 고지서는 실제 거주자에게 날아가고, 세입자가 매달 함께 낸다.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은 그래서 소유자가 세입자 대납분을 반환하도록 못 박았다. 세입자가 요구하면 관리사무소는 지체 없이 납부확인서를 내줘야 한다는 조항도 함께 뒀다.
◆ 고지서 두 줄의 차이…수선유지비는 그대로 사라진다
한국부동산원이 지난 3월 발표한 공동주택관리정보시스템 통계를 보면 전국 아파트 장기수선충당금 월 부과액은 ㎡당 295원이다. 1년 전보다 올랐다. 전용 84㎡로 환산하면 한 달에 2만4780원이다.
같은 통계에서 수선유지비는 ㎡당 95원이다. 전구 교체, 공용 청소, 소모품 교환처럼 당장 쓰는 돈이다.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은 이를 공용관리비 항목으로 분류하고 실제 거주자가 부담하도록 한다. 전용 84㎡ 세입자가 2년간 내는 수선유지비는 약 19만원인데, 이 돈은 이사하는 날 그대로 사라진다.
서울시 집합건물분쟁조정위원회의 한 조정위원은 "장기수선충당금은 장래 대규모 수선을 위한 소유자 부담 적립금"이라며 "반면 수선유지비는 일상 유지관리 비용으로 거주자 부담이 원칙이라 반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 이사 당일 확인서 한 장…거부하면 지연이자까지
절차는 단순하다. 이사 전에 관리사무소에 거주 기간 동안 낸 장기수선충당금 납부확인서를 요청한다. 보증금을 정산할 때 이 확인서를 집주인에게 내밀고 금액을 받으면 된다. 국토교통부 중앙공동주택관리지원센터가 안내하는 사례도 이 방법으로 2년치 60만원을 전액 돌려받았다.
집주인이 버티면 법원이 나선다. 경기 광주시의 한 아파트 세입자는 퇴거하며 2년간 대납한 58만여원을 달라고 했다. 집주인은 세대 원상복구비를 공제해야 한다며 지급을 거부했다. 수원지방법원은 집주인에게 원금에 지연손해금까지 얹어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청구를 미뤄도 권리가 바로 사라지진 않는다. 민법상 채권 소멸시효가 10년이어서, 임대차 계약이 끝난 뒤 그 기간 안이면 이사를 나간 뒤에도 집주인에게 청구할 수 있다. 오피스텔과 상가도 집합건물법 개정으로 수선적립금을 구분소유자가 부담하도록 바뀌었다.
◆ '임차인 부담' 특약 한 줄이 변수
예외가 있다. 임대차계약서 특약에 '장기수선충당금은 임차인이 부담한다'는 문구가 들어간 경우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은 이런 특약이 있으면 유효성을 두고 다툼이 생길 수 있다고 안내한다. 사적 자치 원칙이 적용돼 환급 청구가 기각될 수 있어서다. 대한주택관리사협회도 계약서를 미리 확인하라고 권한다.
관리사무소의 회계 처리도 변수다. 장기수선충당금으로 집행해야 할 공사를 수선유지비 계정으로 돌리면, 세입자는 집주인 몫의 큰 공사비를 일상 관리비로 내고도 돌려받지 못한다. 서울의 한 아파트 관리주체는 배관·누수 방수 공사비를 수선유지비로 집행했다가 관할 구청에서 과태료 1000만원을 받았다.
◆ 5년간 위반 3299건…열에 아홉은 '지도'로 끝
감시는 느슨하다. 같은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적발된 장기수선충당금 관련 위반은 3299건이다. 유형별로는 일반 관리비 등 다른 데 쓴 '목적 외 사용'이 넷 중 하나로 가장 많았고, 아예 적립하지 않은 경우도 여덟에 하나였다. 적발 뒤 처분은 행정지도와 시정명령이 열에 아홉 가까이였고 과태료는 열에 하나 남짓이었다.
조인철 의원은 7일 "장기수선충당금을 사적 자치 핑계로 방치하면 입주민 갈등이 깊어진다"며 "국토부 차원의 상시 감시망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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