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일은 한글날이다. 1926년 '가갸날'로 정한 지 100년째이다. 한글 창제에 나타나는 독창성과 창의성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공연한 미사여구는 접고 닿소리 'ㄹ'에 한글 우수성의 극치가 숨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1991년 필자가 미국 브라운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육조교(TA)를 할 때였다. 담당 교수는 수강생들에게 한글의 우수성에 관해 강의하라고 했다. 필자는 신경준과 홍양호가 18세기부터 주장했던 닿소리 창제 원리인 '발음기관 상형설'을 중심으로 설명했다. 이는 발음기관의 형태를 본떠 기본 문자를 만들고, 같은 계열의 문자는 기본 문자에 획을 더해 만든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예외처럼 보이는 글자가 있었으니 바로 'ㄹ'이었다.
컬럼비아대학교 래디어드 교수는 1966년 박사학위 논문에서 'ㄹ'의 창제 원리를 설명할 수 없다며 한글보다 300여 년 전에 나온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모방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ㄹ'을 90도 정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파스파 문자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었다. 이후 일리노이대학교의 김진우 교수도 '언어'(1985, 2014)에서 래디어드 교수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주장은 'ㄹ'의 창제 원리를 간파하지 못했고, 훈민정음의 일부가 기존 문자를 모방했다고 봄으로써 한글의 독창성과 창의성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필자는 'ㄹ' 역시 발음기관을 정확하게 본떠 만든 문자이며 'ㄹ'은 'ㄴ'을 기본으로 입천장을 나타내는 '―'를 더하고, 혀의 뒷부분이 '∧' 모양으로 상승하는 것을 나타내는 'ㄱ'을 더해 만든 글자임을 주장한다.
'ㄴ'을 만들 때 혀끝을 윗잇몸에 댄 모습을 옆에서 보면 'ㄴ'과 비슷하며 이 혀의 모양을 본떠서 'ㄴ'을 만들었다. 'ㄴ'에서 'ㄹ'이 되는 과정엔 두 단계를 거친다. 우선 입천장을 나타내는 '―'를 가획(加劃)했다.
'―'의 가획은 'ㄴ'과 'ㄷ'의 차이에서도 나타난다. 'ㄴ'에 입천장을 나타내는 '―'를 더하면 'ㄴ'과 같은 계열의 'ㄷ'이 된다. 'ㄴ'은 콧소리이므로 공기가 코로 통할 수 있지만, 'ㄷ'을 발음할 때는 입천장 뒤쪽이 올라가 코로 가는 통로를 막는다. 따라서 입천장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ㄴ'에는 입천장 '―'를 붙이지 않지만, 역할을 하는 'ㄷ'에는 '―'를 더한 것이다. 같은 계열의 'ㄹ'은 'ㄴ'과 달리 'ㄷ'처럼 입속에서 나는 소리다. 따라서 입속 소리 'ㄹ'로 가는 과정에도 '―'를 붙인 것이다.
'ㄷ'은 그 자체로 완성된 문자지만 'ㄹ'은 'ㄷ'에 'ㄱ'을 한 번 더 가획해야 한다. 강신항 교수의 '훈민정음 연구'(2003)에 따르면 세종대왕 당시 'ㄹ'은 초성과 종성에서 음가가 달랐는데 초성의 소리는 반설경음, 종성의 소리는 반설중음이라 구분했다. 종성인 반설중음을 기본으로 보고 'ㄹ'을 썼고 초성인 반설경음엔 'ㄹ'자 밑에 작은 동그라미 '°'를 붙였다. 종성 'ㄹ'과 초성 '동그라미 붙인 ㄹ'의 음가가 달랐지만 음가 차이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다.
현대 국어에서는 종성 반설중음과 초성 반설경음의 차이가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초성과 종성에서 차이가 나는 영어를 참조해 보자. 영어에서 /l/은 초성의 '맑은'(clear) /l/과 종성의 '어두운'(dark) /l/로 나뉜다. 어두운 /l/은 heal에서처럼 발음할 때 혀의 뒷부분을 상승시키며 발음하고 맑은 /l/은 like에서처럼 혀 뒷부분의 움직임이 없다.
필자는 초성의 반설경음이 영어 맑은 /l/에, 종성의 반설중음이 영어 어두운 /l/에 가까웠다고 본다. 종성의 반설중음을 기본음으로 보면, 종성 'ㄹ'은 혀의 뒷부분이 상승하는 특징을 보이게 된다. 결국 'ㄹ'은 'ㄴ'에 입속 소리를 나타내려 입천장 '―'를 더한 뒤 혀 뒷부분의 상승을 표시하려고 'ㄱ'을 더한 것이다. 'ㄱ'은 혀의 뒷부분이 상승해 입천장 뒤쪽을 막았다가 터트리며 내는 소리인데 혀의 뒷부분을 옆에서 보면 '∧'와 비슷한 모양이 되고 이것을 시계방향으로 90도 정도 돌리면 'ㄱ'이 된다.
'ㄹ'은 'ㄴ'에 입천장 '―'를 얹고 혀의 뒤쪽이 상승하는 표시로 'ㄱ'을 얹은 것이다. 두 번 가획한 'ㄹ' 속에 발음기관을 상형한 한글의 독창성, 창의성 및 우수성이 다 들어있다.


































댓글 많은 뉴스
李대통령 국정지지율 37.4%, 3주만에 하락…부정평가 59.8%
[단독] "광주-대구 다르다" 중앙부처 '군공항 이전' 노골적 차별
"농지조사, 투기 잡겠다더니 도지만 잡나"…지방 농촌 '불똥' 우려
아시안게임 '군면제' 폐지 법안 추진될까?…축구·야구 특혜 논란, 비인기 종목엔 '생존 문제' [금주의 이슈]
[단독] 'K-선거' 배우러 온 11개국에 '투표용지 부족' 숨긴 선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