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치에서 '농심'(農心)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져왔다.
농촌 인구는 과거보다 크게 줄었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부모와 도시에 사는 자녀, 고향의 농지와 상속 문제 등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여전히 넓다. 농촌 문제가 농민들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 이유다.
8일 정부의 움직임은 그런 '농심의 무게'를 한꺼번에 보여준 날로 기록될 만하다.
오전에는 농림축산식품부가 농지 전수조사 후속대책을 내놨다. 투기가 아닌 상속농지와 고령농·관행적 임대차, 복잡한 소유관계 농지, 맹지·영농곤란 농지, 미허가 농업시설 등은 처분 절차로 이어지지 않도록 특별조치법을 만들겠다고 했다.
오후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CPTPP 가입을 올해 안에 신청하지 말라고 제동을 걸었다.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동반자협정)는 일본·호주·캐나다·멕시코·베트남·영국 등 12개국이 참여하는 대형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으로, 상품 관세뿐 아니라 서비스·투자·디지털 통상 등 폭넓은 분야에서 높은 수준의 시장 개방을 요구한다. 한국이 가입하면 수출시장 확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농축수산물 수입 증가와 국내 농어업 생산 감소 우려도 함께 제기돼왔다. 정부 역시 농림수산업에서 상당한 생산 감소가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해 농어민 반발이 가입 논의의 주요 변수로 꼽혀왔다.
이같은 행보를 보인 청와대가 밝힌 이유도 분명했다.
"정부와 농어민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우선이다."
하루 사이 농지와 통상이라는 서로 다른 두 정책에서 동시에 '농민 신뢰'가 정부의 속도조절 이유가 된 셈이다.
◆쌀시장 개방에 사과한 김영삼…농특세까지 만들었다
농심의 반발이 정부 정책을 크게 흔든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쌀시장 개방을 막겠다고 약속했지만 협상 결과 최소시장접근 방식의 쌀 수입을 받아들여야 했다. 농촌의 반발과 국민적 불안이 커지자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에 나섰고, 이듬해 대통령 직속 농어촌발전위원회를 만들었다.
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농어촌특별세를 신설해 10년 동안 별도 재원을 마련했고, 기존 농어촌구조개선사업 42조원에 더해 농특세 재원 15조원을 농촌에 투입하는 대규모 후속대책을 내놨다.
개방 자체를 뒤집지는 못했지만, 농민 반발 뒤 정부 정책의 규모와 방향이 크게 달라진 대표적인 사례다.
◆FTA도 그냥 밀어붙이지 못했다…지원금·기금이 따라붙었다
2000년대 이후 자유무역협정에서도 비슷한 장면은 반복됐다.
노무현 정부는 농민들의 거센 반대에도 한·칠레 FTA를 철회하지 않았다. 다만 비준은 여러 차례 진통을 겪었고 농업 피해 지원과 구조조정 대책이 협정 추진 과정의 핵심 정치적 과제가 됐다.
2015년 한·중 FTA 때는 더욱 구체적이었다. 비준을 앞두고 농어민 피해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자 여야정은 농어촌 상생협력기금 1조원을 만들기로 했다. 여기에 정부는 10년 동안 1조6000억원 규모의 추가 농어업 지원책을 마련하고 피해보전직불제 보전비율도 높였다.
주목할 건 그때 약속했던 상생기금이 11년 뒤인 이날 다시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재명 정부는 CPTPP 가입 속도를 늦추면서 한·중 FTA 당시 약속했던 1조원 가운데 아직 채워지지 않은 7000억원을 정부 재정으로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과거 농심을 달래기 위해 만든 약속의 미완성분을, 또 다른 시장 개방 논의를 앞두고 정부가 다시 꺼내든 셈이다.
◆개방은 했지만 그냥 가지 못했다…WTO 때도 반복된 장면
문재인 정부 때도 비슷했다.
2019년 정부가 향후 WTO 협상에서 개발도상국 특혜를 주장하지 않기로 하자 농민단체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정부와 농민단체 간담회가 파행됐고 농민들은 공익형 직불제 도입과 농업예산 확대, 농어촌상생기금 부족분 정부 출연 등을 요구했다. 정부는 개도국 특혜 포기 방침 자체를 되돌리지는 않았지만 농업 지원 확대와 공익형 직불제 도입 등을 약속하며 후속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러고 보면, 역대 정부는 통상과 개방이라는 큰 방향에서는 물러서지 않더라도, 농심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결국 별도의 재정·보상·제도개편 카드를 꺼내야 했다.
◆이번에는 '사후 보상' 전에 멈췄다
그런 점에서 8일 이재명 정부의 대응은 과거와 조금 다른 면모가 있다.
과거에는 시장 개방을 결정하거나 협정을 체결한 뒤 농민 반발을 달래기 위해 보완책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CPTPP 가입 신청 자체를 아예 일단 멈췄다. 또한 농지 전수조사에서도 조사 원칙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대신 특별법까지 만들어 일반적인 상속·임대·미허가 농지는 처분 대상에서 빼겠다는 방향을 택했다.
두 사안 모두 정부가 추진해온 정책의 속도를 농심 때문에 조정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치권에서 오래된 말처럼 쓰이는 '농심이 곧 민심'이 언제나 통계적으로 맞는 명제일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 현대 정치사를 돌아보면 농촌에서 시작된 불만을 단순히 농촌 안의 목소리로 치부했다가 뒤늦게 더 큰 비용을 치른 정부는 적지 않았다. 결코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이번에 정부가 농지와 CPTPP라는 두 현안에서 동시에 브레이크를 밟은 것은 그 오래된 정치적 학습효과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비록 농촌 인구는 점점 줄어도 농심의 정치적 무게까지 같은 비율로 줄어든 것은 아니라는 것.
역대 정부가 여러 차례 배운 교훈을 이재명 정부도 다시 확인한 하루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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