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 누군가를 계속 때리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 때가 있다.
맞는 사람이 오히려 커진다.
특히 원래 정치인이 아니었던 고위 공직자가 정권이나 거대 정당과 충돌하고 집중 공격을 받으면 어느 순간 "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이른바 '대망론'이 붙는다.
최근 조희대 대법원장을 두고 이런 말이 조심스럽게 나오기 시작했다. 여권이 대법원장 제청권과 국회 출석 문제 등을 놓고 공세를 이어가면서 일부 보수층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을 차기 주자로 거론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런 대망론 형성 구조를 두고 '난가병'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다음 대통령은 나인가'라는 말을 줄인 풍자다. 물론 조희대 대법원장은 현재까지 정치 참여나 대선 출마 의사를 전혀 밝힌 적이 없다. 아직은 주변에서 만들어지는 대망론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국 정치사를 뒤져보면 이런 장면이 낯설지만은 않다.
◆공격하다 정말 대통령 만들어버린 윤석열
가장 극적인 사례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검찰총장에 임명됐던 윤석열 전 대통령은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와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과의 갈등을 거치며 여권과 정면충돌했다.
당시 여권의 공세가 거세질수록 윤석열 전 대통령의 이름은 오히려 차기 대선주자 조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2020년 말 한 조사에서는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 26.7%, 윤석열 검찰총장 21.5%,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 15.6%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이미 전체 2위까지 올라섰다. 검찰총장이 야권 대선주자로 변신하는 과정이었다.
결국 윤석열 전 대통령은 검찰총장 사퇴→정치 참여→국민의힘 입당→대선후보 선출→대통령 당선까지 갔다. 정치적 공격이 상대방에게 전국적 인지도와 '권력에 맞선 사람'이라는 서사를 만들어준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여기서 '추윤갈등'의 장본인 추미애 현 경기도지사에겐 '보수의 어머니'라는 멸칭이 붙기도 했다. 진보 진영 인사가 보수 대통령을 '낳고 길렀다'는 의미다.
◆월성원전 감사로 정부와 충돌, 최재형은 실제 출마까지
최재형 전 감사원장도 비슷한 코스를 밟았다.
월성원전 1호기 조기폐쇄 감사를 비롯해 문재인 정부와 충돌하면서 여권에서는 최재형 감사원장을 향한 비판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보수 야권에서는 최재형 전 감사원장을 새로운 대선주자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최재형 전 원장은 결국 2021년 6월 감사원장에서 물러났고 불과 37일 뒤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출마 선언에서 그는 "일부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맞지 않으면 사퇴하고 정치를 하라고 했다"고 직접 언급했다.
말 그대로 공격과 충돌이 실제 정치 참여로 이어진 사례다. 다만 윤석열 전 대통령과 달리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되는 데는 실패했다.
◆한덕수도 '대망론' 끝에 진짜 출마했지만…
한덕수 전 국무총리는 가장 최근 사례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민주당의 탄핵과 고발 등 정치적 공세가 집중되면서 보수 진영에서는 한덕수 전 총리를 차기 대선의 대안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 역시 처음엔 '한덕수 대망론'에 가까웠지만 결국 현실이 됐다. 한덕수 전 총리는 2025년 5월 2일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는 "권력을 목표로 살아온 정치인은 개헌을 완수하기 어렵다"며 공직 외길을 걸은 자신이 새로운 역할을 맡겠다는 논리까지 폈다.
하지만 국민의힘 후보 교체 과정에서 당원들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서 본선 무대에는 서지 못했다. 공격받던 고위 관료→대망론→실제 출마까지는 윤석열 전 대통령과 닮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에게 붙었던 대망론은 지금은 '대차게 망한 대권론'이라는 말장난이 떠오를 정도로 상황이 뒤집혔다. 대선 본선에는 오르지 못했고, 이후 12·3 비상계엄 관련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 재판에서 1심 징역 23년, 항소심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현재 상고심이 진행 중이다. 별도로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 헌법재판관 미임명·지명 의혹 사건 재판도 이어지고 있다.
◆고건·황교안·반기문…'대망론'만으로 대통령 되는 건 아니다
고건 전 국무총리는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와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으며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다. 한동안 범여권의 가장 유력한 차기 주자로 꼽혔지만 2007년 1월 결국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치권에서 물러났다.
2017년에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비슷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보수 진영의 유력한 대안으로 급부상했고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불출마 뒤에는 지지층 상당수가 황교안 권한대행에게 이동할 것이라는 조사까지 나왔다. 그러나 황교안 전 총리 역시 "국정 안정과 공정한 대선 관리"를 이유로 출마하지 않았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한 단계 더 갔다. 국제무대 경력과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한때 차기 대선주자 조사 선두권까지 올랐고 직접 "국민으로서 역할을 고민하겠다"며 출마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귀국 뒤 각종 검증과 정치권 공세를 겪다가 결국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고건·반기문 등 엘리트 관료 출신의 대권 도전을 아예 '잔혹사'라고 묶어 설명하기도 했다.
◆재미 삼아 계산해보면…대통령까지 간 건 6명 중 1명
윤석열·최재형·한덕수·고건·황교안·반기문 등 '비정치권 또는 고위 공직자 출신으로 대망론이 크게 형성된 주요 사례' 6명을 임의로 뽑아보자.
대통령까지 된 사람은 윤석열 전 대통령 1명이다. 약 17%.
실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사람은 윤석열·최재형·한덕수 등 3명이다. 50%.
나머지 고건·황교안·반기문은 대망론은 크게 일었지만 대선 본선에는 서지 않았다. 역시 50%.
물론 이건 대한민국 헌정사 전체를 대상으로 한 통계가 아니며 기준도 기자 마음대로다. 그래도 한 가지는 보인다. 대망론이 뜨는 것과 대통령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얘기다.
◆그런데 왜 상당수가 보수 주자일까
주목할 부분은 앞서 열거한 6인 중고건 전 총리를 제외하면 주로 범보수 진영에서 대망론으로 소비된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단순 계산으로 5명 대 1명. 약 83%가 범보수 쪽이다. 통계 수치야 엉터리지만 한국 정치의 특징은 날카롭게 드러낸다.
보수 진영은 기존 정치권의 경쟁력이 약해질 때 검사·판사·총리·감사원장·외교관처럼 국가기관에서 경력을 쌓은 '엘리트 관료'를 외부에서 차기 지도자로 호출하는 사례가 반복됐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 최재형 전 감사원장, 황교안 전 국무총리,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모두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이 틀에 들어간다.
반면 진보 진영에서는 공격받던 비정치권 관료가 어느 날 갑자기 대선주자로 변신하는 사례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다만, 조국 전 조국혁신당 대표(현 조국혁신당 혁신정책연구원장)나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현 이재명 정부 정무특보)처럼 애초부터 정치권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인물이 공격과 수사를 거치며 지지층의 상징으로 커지는 방식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진보는 공격받은 정치인을 더 큰 정치인으로 만들고, 보수는 공격받은 관료를 새 정치인으로 불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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