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일제침략으로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이할때까지, 그리고 해방으로부터6.25이후까지, 우리나라 농촌에서 살았거나 성장했던 사람들치고 가난이란궁핍을 겪지 않았던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백여호를 헤아리는 시골마을에서도 소작으로 연명하거나 남의 집에 드난살이로 명줄을 이어가는 농촌빈민들은 허다하였다.굶기를 밥먹듯 그 당시엔 역병으로 일컬어졌던 전염병이 마을에 퍼지게되면,대다수의 노약자들과 어린이들이 그 역병으로 몰사를 당하는 것은 예사로운일이었다. 전염병을 이겨낼 수 있을 근력도 없었거니와 예방약이나 치료약도없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 대다수는 인중에 누런 콧물을 달고다니는 코흘리개들이었고, 볼따구니에는 계절을 막론하고 항상 마른버짐이 피어 있었다.코를 흘리거나 마른버짐이 핀다는 것은 바로 영양실조 때문이란 것을 알게된것은 몇년전의 일이었다. 면소재지라는 마을에서도 자신의 권속들을 굶기지않고 보리고개까지 무사히 넘길수있는 집은 몇집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다수의 아이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밤마다 먹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운수 사나운 강아지는 꿈을꿔도 호랑이만 나타나더라고 먹는 꿈조차 꿀수없는 아이들도많았다.
귀빠진 날로 지칭되는 생일날이나 되어서야 조밥이나 보리밥이긴 하지만 그릇가녁이 보이지않게 안다미로 담은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 소풍가는 날이면, 그 조밥이나 보리밥에 삶은 고구마 두개 정도가 보태지고, 봄이나 가을소풍때 한번쯤은 삶은 달걀 한개가 곁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한개의 달걀을몽땅 먹어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워 흰자위만 먹고 노른자위는 손에 쥐고있다가갑자기 나타난 힘센 아이에게 빼앗겼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얼마나 분했고얼마나 애틋했으면 그로부터 50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지금까지 그힘센 아이의얼굴을 기억하고 있을까.
어머니의 손도장 어머님 역시 농사꾼이셨다. 봄이 되어 땅이 풀리기 시작해서부터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 아침에 들녁으로 나가시면 땅거미가 내리거나혹은 달이 뜨고난 뒤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집으로 돌아오시면, 하루의 근력이 모두 소진되어 아랫목에 몸을 뉘이시고 밤새 끙끙 앓으셨다. 그런데 어머님은 때때로 집으로 돌아오시는 길로 곧장 안방에 있던 고미다락으로 올라가실 때가 있었다. 그땐 뭔가를 앞치마속에 감춘채 다락으로 올라가셨다가 다락을 내려오실 때는 감춘 것이 없어지곤 하였다. 그리고 적어도 하루에 한번 정도는 그 다락문에 채워둔 자물쇠를 확인하곤 하셨다. 어린 아우와 나는 어머님의 의미심장한 다락출입을 눈여겨본 것이었다. 어머님께서 때때로 다락으로올라가서 은밀하게 감춰두고 내려오는 것은 도대체 뭘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이길래, 어머님의 경계가저토록 삼엄한 것이며, 의구심의 시선을 보내는 우리 형제들의 관심을 다른곳으로 따돌리려고 노력하고 계시는 것일까. 그러나그 의구심을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던 우리 형제는 어느날, 어머님이 집을비운 사이에 자물쇠를 따고 그 다락으로 올라갔다. 다락에서는 그러나 우리들이 호기심을 충동질할 만한 물건을 찾을수 없었다. 다만 다락 한켠에 작고평범한 항아리 하나가 놓여있었을 뿐이었다. 적지않게 실망한 우리 형제는무심코 그 항아리속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아우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오랫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때 아우와 내가 느꼈던 허탈감과 어머니에 대한 막연한 배신감은 오랫동안 우리들 가슴에 응어리되어 남았다.애끓는 비애가 있기때문 다락에 놓여있던 그 항아리에 가득 채워져있던 것은바로 쌀이었다. 보리나 좁쌀 한톨 섞여있지 않았던 그 온전한 쌀을 어머님은혼자서만 바라보며 즐겨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혹여 누가 다락을 침입해서쌀을 축낼까하여 그위에다 손바닥 자국을 선명하게 남겨두신 것이었다. 생쌀을 주머니에 넣고 군것질로 즐겨 먹었던 그 시절, 아우와 내가 쌀 한톨 건드리지 못하고 다락을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었던 비애는 바로 어머님이 남기셨던 그 간드러진 손도장 때문이었다. 우리들이 분노하는 마음으로 쌀을 지키려하고있는 것은, 쌀이 가진물리적인 의미보다는 그 쌀에 스며있는 우리의 곡절많은 정서와 애끓는 비애가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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