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제15회 매일여성백일장-산문 여고부-아기수첩

전선아〈오상고 2〉

우리 집은 남들만큼 행복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가족이다.

아침만 되면 피곤에 지쳐 겨우겨우 일어나 씻고 꾸역꾸역 아침을 먹고 나가는 실업자 아버지.

일찍 일어나 단잠을 빼앗긴 신경질을 모두 쏟아내며 아침을 준비하는 엄마. 그리고 나. 사춘기의 짜증을 모두 가진….

얼마 전, 뉴스에서 이런 기사를 들은 적이 있다. 가족 간의 대화가 점점 단절되어 간다는…. 딱 우리 집이다.

무남독녀 외동딸에 부모님이 계신 겉보기에는 흠이 없는 집이지만, 적막한 분위기에 싸인 우리 집은 침묵을 벗어낼 줄도 벗어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 집의 분위기가 이렇게 된건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아빠의 주식 때문이다. 그 전의 우리 집은 중상류층의 가정이었다. 많이 풍족한 건 아니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웬만하면 다 할 수 있던,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는 됐었다.

아빠가 처음 주식에 손을 댄건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에 주식을 하게 되었을 때, 아빤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영은아,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우리 영은이 맛있는 거 더 많이 사주고 예쁜 옷도 많이 사줄게. 약속!" 그렇게 손도장까지 찍고 꼭꼭 약속했었는데, 그랬었는데….

아빠의 기대에 부푼 희망과는 달리 마침 그 때에 불어닥친 IMF 한파로 인해 주식은 폭락을 면치 못했고, 그것을 만회해 보려는 아빠의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연일 하한가였다.

설상가상. 갑작스런 아빠의 명퇴. 지금 우리 집은 완전히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아빠는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

명예퇴직 후 자신감을 잃은 축 처진 어깨를 얻었고, 주식으로 퇴직금까지 날려버리고 그 동안 모아두었던 통장들을 모두 잃는 절망을 얻었고, 그리고 엄마의 잔소리와 눈물에 한숨도 얻었으며, 게다가 나의 불신까지 얻어버리셨다.

아빠의 따뜻한 미소도, 사랑도 모두 재떨이의 구겨진 담배꽁초로 사라졌다.

나도 그 후 자신감도 잃었고 웃음없고 조용한 말없는 아이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들어왔던 나는 어릴 때부터 외국어 고등학교에 가기를 희망해 왔다. 외교관이라는 꿈도 있었기 때문에 꼭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꿈은 곧 반대에 부딪혔다. 단지 외고에 가면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난 그일로 부모님과 많이 싸웠다.

아빠, 엄마가 내 인생 책임질 꺼냐면서…. 내가 이렇게 계속 살아야 되겠냐고, 난 엄마같이 살기 싫다고. 아빠처럼 무능력하게 사는 것도 싫다고….

나는 내가 결정한대로 외고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나도 나의 결정으로 부모님의 힘든 고생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진학한 외고는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곳이라 나는 우리 집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진학 문제로 부모님과 큰 마찰이 있었던 관계로 난 부모님의 따뜻한 환송은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난 하나 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옷에서부터 책과 학용품들, 그리고 필요한 여러 가지들을 챙기며 나는 그 동안 지저분하게 쌓여 있던 책 더미를 정리하게 되었다.

그 책 속에는 본 적이 없었던 앨범이 하나 있었다. 궁금한 마음으로 나는 그 앨범을 열어 보았다.

'아기 수첩'

수첩 귀퉁이가 조금 닳아서 너덜너덜 해진 그 수첩엔 아기수첩이라고 씌어져 있었고, 또 표지엔 김영은이라는 내 이름도 눈에 띄게 써 있었다.

호기심에 넘긴 수첩을 나는 덮어버릴 수가 없었다..

-9월 3일.

8주란다. 아내 뱃속의 아이가, 바로 내 아이가 지금 8주째 자라고 있다고 했다. 난 지금 떨리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다. 드디어 내가 아빠가 된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다.

-9월 4일.

벌써 아내와 상의를 해 두었다. 남자아이면 영호, 여자아이면 영은이.

내일은 우리 아이 옷을 사러 가기로 했다. 여자 아이 옷을 사기로 했다.

우리 부부 모두 여자 아이를 원하기 때문이다. 내일이 기다려진다.

이 두 편의 일기로 시작한 나의 아기 수첩. 아빠가 쓴 것이다.

이 두 편 말고도 내가 태어나서 3살까지의 일이 모두 씌어져 있었다.

이 수첩에 씌어진 일기를 읽으면서 나는 마음 속에 차오르는 뭉클한 감정을 눈물로 흘리고 있었다.

아빠와는 말도 잘 안 했었고 가슴에 못을 박는 그런 심한 말까지도 서슴없이 했던 나를 이런 커다란 사랑으로 키워주셨다는….

감동 반, 미안함 반으로 흘린 눈물에 얼룩진 얼굴을 닦을 새도 없이 나는 아빠,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안방에서 멍하니 앉아 계시던 아빠와 다림질을 하고 계시던 엄마는 내 얼굴을 보시고는 왜 그러냐고, 무슨 일이냐며 걱정스레 살피신다.

나의 모진 말에 가슴에 박힌 못을 빼내지도 못하신 채 말이다.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울면서 나는 이 말밖엔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죄송하고 미안하다고….

내가 아빠가 쓴 아기수첩을 보고서 너무나 죄송했고 이제야 부모님의 모든 사랑을 느꼈다고 하자 아빠는 말 없이 날 끌어안아 주셨고 엄마는 소리 없는 눈물만 흘리셨다.

내가 학교로 들어가게 되는 날 아침. 엄마로부터 아빠가 취직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국가에서 하는 공공근로사업에 나가게 되셨다는 것이다.

아빠는 일하러 나가시면서 돈을 얼마 쥐어 주신다.

"영은아, 그 동안 아빠가 미안했다. 이젠 아빠도 열심히 일할 테니 영은이도 기죽지 말고…. 알았지?"

부끄럽고 쑥스러웠다.

그래서 그때에는 대답을 못했지만 가슴 속으로 내 자신에게 말했다.

"알아요, 아빠. 아빠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지만 아빠, 잊지 마세요. 제가 아빨 많이 사랑한다는 걸요. 사랑해요, 아빠".

나는 외고에 진학했다.

힘든 일이었겠지만 부모님의 사랑으로 꿈에 대한 소망으로 난 꼭 성공하도록 할 것이다.

지금 내 책상머리엔 작은 수첩이 있다. 나를 지켜주는….

바로 아빠의 '아기 수첩'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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