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은 지구의 속살이다. 생명을 이어 주는 세포가 살아 있는 한 속살은 돋아나기 마련이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때도 모든 식물이 죽었지만 이듬해 봄 쑥은 지표를 뚫고 살아났다. 쑥은 강인한 생명력의 표본이다.
시인 T. S. 엘리어트는 '황무지'란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고 읊었다. 시인은 추위에서 갓 깨어난 대지에 봄이 오는 소리를 듣고 봄비가 잠든 뿌리를 흔들어 향이 짙은 라일락의 꽃핌을 예고했다. 4월을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한 것은 새순들이 껍질을 찢고 나와야 하는 아픔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했으리라.
꽁꽁 얼어붙어 있는 겨울 대지를 보면 봄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더욱이 원자폭탄의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간 땅에는 풀잎 하나 돋아 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계절은 순환의 질서에 따라 새싹과 꽃들을 데불고 현신하듯 돌아와 대지를 푸르게 수놓는다.
반칠환 시인은 대지에 싹과 꽃을 피워내는 '보이지 않는 손'을 요리사에 비유해 '봄'이란 시를 썼다. "저 요리사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겨우내 냉동고 같았던 지구의 거죽을 뚫고 봄이 오면 싱그럽게 솟아오르는 새싹들의 혁명과업은 한마디로 경이로운 은총 그 자체다.
눈보라치는 겨울 몇 달 동안의 혹한을 견뎌내고 새순들이 이룬 쾌거는 정말 장하다. 그러나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의 숨통을 거둬가는 방사성 원소의 가공할 위력을 견뎌내고 생명의 숨결을 보듬어 새싹으로 피워내는 쑥의 끈질김 앞에는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지금 일본 후쿠시마 쓰나미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원자로 붕괴로 인한 방사능 오염 재난도 낙담만 하고 있을 게 아니다. 들판 여기저기의 밭둑에 돋아나고 있는 쑥을 보면서 '언젠가 봄은 반드시 오려니'하고 희망과 용기를 갖는다.
나는 쑥을 좋아한다. 쌀가루에 해쑥을 버무려 찐 쑥 털털이도 좋고, 멸치 우린 물로 끓인 쑥국은 말 할 것도 없다. 훌쩍 자란 쑥의 대궁이만 잘라 빚은 쑥떡도 감칠 맛 나는 음식 중의 하나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바닷가 쪽으로 쏘다니면서 만난 이른 봄의 도다리 쑥국 맛은 여태까지 먹어 봤던 쑥 관련 음식 중에 단연 백미였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란 말이 있듯 바다 밑 모래밭에서 겨울을 이겨낸 도다리란 놈과 해충을 잡는다는 구실로 밭둑에 불을 지르는 농부의 손길을 피해 돋아난 쑥의 만남은 환상이다 못해 묘미의 극치였다.
남해 지방의 전라도 사람들은 해마다 '보리 싹을 넣은 홍어 애국을 먹어야 봄기운을 차린다'지만 경상도 쪽 사람들은 도다리 쑥국을 봄철 미각의 으뜸으로 친다. 봄철은 도다리 산란기다. 해마다 이맘때면 도다리들은 민족번영의 꿈을 위해 부른 배로 몸살을 앓는다. 암놈은 노르스름한 알을 배고 수놈은 이리(정액)를 가득 품어 상대를 만나기만 하면 한바탕 축제를 벌일 작정이다.
쑥국에 들어가는 도다리는 수놈이 맛이 낫지만 골라 먹을 수는 없다. 약간의 된장을 푼 쌀뜨물에 도다리를 넣고 끓이다가 고기가 익을 무렵 다진 마늘과 어슷 썬 풋고추를 넣는다. 그런 다음 해쑥 한움큼을 넣고 가스 불을 꺼버리면 맛은 일손 바쁜 주방장 대신 만물을 주관하는 하나님이 책임을 진다.
금년에도 통영 정량동에 있는 한산섬 식당(055-642-8021)이나 여객선 터미널 앞 분소식당(055-644-0396)에 가서 도다리 쑥국 한 그릇을 먹고 와야 봄 신명이 제대로 접힐 것 같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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