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축구계의 대표 주자 홍명보. 월드컵 원정 8강 진출에 대한 국민적 염원을 등에 업고 작년 6월 국가대표팀 감독에 부임한 그가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 리그에서 보여준 경기를 두고 축구팬들의 원성이 대단하다. 더욱이 졸전 끝에 1무2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귀국한 그를 대한축구협회가 유임시키자 분노가 들끓고 있다. 인터넷과 SNS에선 홍 감독을 패러디한 동영상들이 앞순위에 올라 있고, 그를 모델로 CF를 만든 기업들은 곤욕을 치르고 있다.
여기서 잠깐 23개월 전으로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2012년 8월 11일 영국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 한국과 일본과의 하계 올림픽 남자 축구 동메달 결정전이 열렸다. 경기 시작 전까지 일본의 우세가 점쳐졌으나 결과는 한국의 2대0 승리. 박주영과 구자철이 잇따라 골을 넣으며 완승을 거뒀다. 박주영은 일본 수비수 3명을 제치며 슛을 성공시켜 '환상의 골' 이란 격찬을 받았다. 우리나라가 올림픽 남자 축구에 출전한 지 64년 만에 거둔 첫 메달이어서 국민들의 열광은 대단했다.
이 쾌거의 지휘자가 홍명보 감독이었다. 홍 감독은 지리멸렬 상태였던 대표팀을 똘똘 뭉치게 하고, 박주영을 와일드카드로 뽑아 축구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조국에 바쳤다. 특히 감동적이었던 것은 후반 막판 4분을 남겨두고 당시 대구 FC 소속 김기희를 투입한 장면이었다. 메달을 따면 군 복무가 면제되는데 한 번도 출전 못 한 김기희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홍 감독은 승리 후 인터뷰에서 "후반전에 김기희를 언제 투입할지가 최대 고민이었다"고 말해 인간미까지 돋보였음은 물론이다.
이 동메달 획득은 대한민국에 '홍명보 리더십'을 전파시키는 계기가 됐다. 홍 감독은 "우리 팀은 드림팀이다. 좋은 선수가 모여서 드림팀이 아니라 처음엔 미진했지만 꿈을 가지고 그걸 이뤄냈기 때문에 드림팀"이라고 메달 획득 요인을 설명했다. 유명 강사들은 각종 특강에서 잇따라 홍명보 리더십을 강의 소재로 삼았다. '믿음' '격려' '존중' '배려'를 통해 선수들을 하나가 되게 했다고 분석했다. 축구협회는 리더십 위기를 겪던 최강희 당시 감독 대신 국민의 인기를 한몸에 받던 홍 감독에게 대표팀을 맡겼다.
그런 그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래 한국이 조별 리그에서 1승도 거두지 못한 최초의 대표팀 감독이 돼 버렸다. 성난 축구팬들은 우리 대표팀의 패배를 세월호에 이은 또 하나의 '참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이런 상태에서 경질이 아니라 내년 아시안컵까지 맡겼으니 팬들의 아린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오죽하면 대표팀 귀국장에 엿가락이 날아들었을까.
그와 국가대표팀이 비난받는 것은 1승도 거두지 못한 경기 결과가 아니라 너무 무성의하고 한 번 무너지면 도저히 헤어나지 못한 무기력 때문이었다. 일본은 탈락하긴 했지만 경기 내용은 오히려 상대를 압도했다. 이란과 호주도 만만하게 물러나지 않았다. 우리만 수준 이하 경기였다. 이게 국민들을 화나게 만들어 버렸고 홍명보 경질 요구의 근거가 됐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자. 홍명보는 12년 전 국민들에게 엄청난 기쁨을 준 주인공이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시킨 뒤 두 팔을 번쩍 들면서 달리는 장면은 오래도록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그는 지금까지 실력에서나, 인품에서나, 리더십에서나 한국 축구의 대들보였다. 홍명보장학재단이 주최하는 '대한민국 올스타 자선 축구경기'는 11회째 이어져 오고 있다. 여기에는 K리그와 해외파 선수들이 총출동하며 수익금은 불우이웃에 전달된다.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감독이 월드컵 이후에도 계속 감독을 맡은 적이 한 차례도 없지만 이번에는 예외를 둬 보자. 그가 대표팀을 맡은 지는 1년밖에 안 됐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감독이었던 히딩크도 처음 1년간은 엄청 욕을 먹었지만 임기 막판에 명예를 회복했다. 홍 감독의 임기는 아직 1년이나 남았다. 경기 결과를 두고 감독부터 경질하는 관행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비록 젊긴 하지만 이번에 버려지면 한동안 국민들의 사랑을 받기 어렵다. 그건 대한민국의 손실이다. 내년 1월 호주에서 열리는 아시안컵에서 기적처럼 한국 대표팀이 쾌거를 이루게 하자. 다시 한 번 두 팔을 높이 치켜든 그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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