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대격변기로 얘기하는 사람이 많다. 사회주의권의몰락으로 이념 대결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새로이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구촌 곳곳에 국가및 종족간의 전쟁이 불을 뿜고있다. 이러한 국가간·민족간의 무한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선 경쟁력을 높이는수밖에 없다는 말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있다. 이른바 '세계화'와 '국가경쟁력 제고'가 현정부의 국정 목표로 등장할 정도다.그렇다면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정부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분야에서의 개혁을 외치고 있다. 정치관련법 개정과 금융실명제를 실시한데 이어 교육개혁, 사법제도 개혁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앞으로는 사회제도와 교육개혁에 중점을 둔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 특히교육개혁에 비중을 두고있는데 사람에 투자하지 않고는 무한 경쟁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새삼스러운 것은아니다. 이미 2백년전에도 무명의 한 선비가 이를 주창한 바 있다. 조선조영·정조시대를 살다간 실학자 존재 위백규(1727-1798)가 바로 그 사람이다.위백규는 전남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계춘동에서 진사 위문덕과 어머니 평해 오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위백규는 말년에 잠시 옥과현감을 지내기도 했으나 평생을 장흥땅에 묻혀지냈다. 그런 탓인지 호남의 저명한 실학자이면서도 위백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존재(존재)는 전라도에서도 벽지인 장흥출신인데다 성씨마저 희성인 위씨였다. 벽지에 살다보니 변변히 글을 가르쳐줄 스승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이와 관련 그는 자신의 출신 배경을 크게 자랑할것이 없다는 뜻으로 지·인·성 삼벽(삼벽)이라고 말했다.
존재는 이처럼 시골의한미한 집안에 태어난 무명의 선비였으나 90여권이나 되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6·25전쟁등으로 저술의 상당수가 소실되고이중 30여권이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중 그의 대표적 저작으로 꼽히는 '정현신보'(정현신보)는 당시 사회의 모순과 관리의 부패상을 비판하고(시폐) 제도개혁을 주장한(구폐)책이다. 그는 정현신보를 바탕으로 정조에게 그의 경세사상을 설파한 '만언봉사'(만언봉사)를 상소했다. 만언봉사는학문·인재등용·향촌교화·선비의 자세·사치금단·폐단혁파 등 6가지 항목으로 돼있다.
공주대 사학과 이해준교수는 정현신보와 만언봉사 등에 나타난 존재의 경세사상중 향촌사회 개선론과 재야 지식인의 역할에 특히 주목한다. 존재의향촌사회 개선론은 지방교육 개선론으로 집약된다. 그는 서원과 향교의 훈장 선임과 대우, 학생의 자격심사 등에서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있다.훈장을 지역 지식인으로 구성된 선거인단의 투표로 선임하고 특별 대우를할 것을 주장한다. 학생은 학식과 덕행, 나이로 나눠 심사를 하는데 학식보다 덕행을 더 중시하고 있다. 또 무작정 수학하게 할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주었는데도 능력이 미치지 못할 경우 생업에 종사하도록 하는 연령제한을 제시하고 있다.
이교수는 "존재는 교육의 부실과 기회불균등에서 모든 사회병폐가 연유하므로 교육개선을 통해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말했다. 이교수는 이어 "존재는 향리들에 대한 규찰을 서원과 향교의 학생들이 담당하도록 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등 지식인과 학교를 통해 향촌사회의자율과 통제를 확보하려했다"면서 "오늘날의 지방자치와 교육자치의 단초를읽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 당시의 사회상은 어떠했는가. 존재는 정현신보 시폐편에서 당시의사회상을 이렇게 비판한다.
"창고는 텅텅 비었고 가산이 없는 백성은 유랑하여 흩어지고있다. 해마다가뭄이 들고 전염병이 창궐해 많은 백성이 떼죽음을 당하는데도 삼정승을비롯, 고관들은 물론 지방의 수령들까지도 걱정을 나누지 않고 있다. 위로사대부로부터 아래로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기 이익만을 위해 서로 원수같이 반목하니 한·당나라 말기의 폐해도 이처럼 심하지 않았다"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는 느낌이다. 다산보다 35세 연상인 존재가다산과 만날 기회는 없었다. 존재가 임종한 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왔기때문이다. 그러나 존재가 살던 장흥 관촌과 다산의 강진 유배지가 지척이어서 다산이 존재의 저작을 읽었을가능성은 높다. 이에 대해 존재의 후손들은 존재와 다산의 관련성을 입증하려 애썼으나 소득이 없었다. 다산이 존재의 저술을 참고했다면 존재의 위상이 더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대해 존재의 6대 방손인위황량씨는 "관산에도 다산의 제자가 있었던 만큼존재의 저술이 다산에게 전해졌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라고 말했다.존재는 행정제도의 개혁에도 적극적이어서 오늘날의 '작은 정부'를 주장하고있다. 그는 "나라는 중국 한 주의 넓이보다 작은데도 관원의 수는 더많고 또 그에 따르는 아전의 수도 많아 생산하는 자보다 무위도식하는 수가너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관련 그는 "관원과 아전의 수를 줄이고사치를 금하며 백성 모두가 근검절약하는 마음을 갖도록 사회윤리를 확립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존재의 이러한 개혁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되지도, 조정의 정책으로 채택되지도 않았다. 그가 저 궁벽진 땅 장흥출신이었기 때문일까.〈조영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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