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종영 대법원장 지명자

16일 후임 대법원장에 지명된 최종영(崔鍾泳) 전대법관에 대한 법조계 주변의 평은 "법원이 뭘 해야 할 지 헤아리는 분"이란 한마디로 압축된다.

그를 두고 '원칙론자', '외유내강형', '온건.합리주의자', '탁월한 행정가', '까다로운 상관' 등 등 여러 평가가 엇갈리면서도 사법부의 좌표를 짊어질 '큰 그릇'이라는 점에는 별 이견을 달지 않았다.

최 지명자가 93년 10월∼97년 1월 법원행정처장 재직 때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한 부장판사는 "국민들이 법원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늘 노심초사했다"고 말했다.그가 법원 살림을 맡아 하는 동안 행정처의 예산담당자들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고 한다.

예산내역을 올리면 천원 단위까지 용처를 캐묻고 대충 예산을 짜갔다간 "1원이라도 깎으라"고 불호령이 떨어지기 일쑤였다는 후문이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관용차(그랜저)를 '오토'로 바꿔 달라고 건의했을땐 "예산상 우선순위가 아니다"며 가차없이 반려하기도 했다.

최 지명자는 '칸트'와 같은 규칙적인 생활로도 정평이 나 있다.

행정처장 시절 함께 일했던 중견판사는 "일요일엔 어김없이 청계산을 올랐고 다른 스케줄도 대부분 예측 가능했다"며 "무미건조해 보였지만 항상 담담하게 생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용한 성품 이면에는 놀랄만한 '뚝심'이 숨겨져 있다고 한다.

지난 94년 7월 야당이 대법관 인사를 문제삼고 인사청문회를 하자며 사법부를 몰아 붙였을 때 대부분의 고위 법관들은 '일단 피하자'는 쪽이었지만 최 지명자만 유독 "할테면 해보라"고 밀어 붙였고 결국 의원들이 제풀에 포기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사법개혁의 '산파역'으로서 남긴 일화는 더욱 유명하다.

특히 95년 10월 이홍구(李洪九) 당시 국무총리와 일전(一戰)을 벌인 일화는 법조계 안팎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다.

당시 이 총리는 우리도 미국처럼 '로스쿨'을 도입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국립법률 전문대학원의 육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는 과정에서 사법연수원 교육과정을 문제삼았다.

그러자 최 지명자가 법원행정처장 자격으로 즉각 반격에 나서 "총리가 '사법연수원이 교육기관이냐'고 운운한 것에 심히 유감을 표한다"는 성명을 내고 설전을 불사했던 것.

일선 법원 판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최 지명자는 결국 이 총리의 사과를 받아냈고 더이상 '액션'을 취하지 않아 사태의 확전을 막는 용의주도함까지 발휘했다.

사법개혁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지만 그만큼 마음 고생도심했다.

법원이 주도한 1차 사법개혁(93∼94년)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95년부터는 청와대.세계화추진위와 사사건건 맞닥뜨려야 했고 법무부, 변협, 변리사회 등 법조계 내부와도 마찰이 적지 않았다.

법관의 도덕성과 청렴성을 강조하는 일면도 남다르다는 평이다.

대충대충 일하거나 부도덕한 후배들의 경우 결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는 것.최 지명자는 법원행정처장 시절인 95년초 사법사상 처음으로 법관윤리강령을 제정, 발표하기도 했다.

서슬퍼런 유신정권하였던 지난 74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사건당시 '법관기피신청'을 받아들였던 소신 결정은 김 대통령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던 김 대통령은 서울형사지법의 재판장이 녹음테이프검증과정에서 "사전 선거운동을 했구먼"이라고 한마디 내뱉자 '재판부가 예단을 갖고 있다'고 판단, 법관기피신청을 냈었다.

그러나 기피신청은 줄줄이 기각된 뒤 항고.재항고 끝에 서울고법에 돌아왔고 이재화(李在華) 헌법재판소 재판관과 함께 당시 형사1부의 배석판사였던 그는 그해 12월 기피신청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런 소신으로 향후 인사에서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맛보기도 했다.

최 지명자는 지난해 여성단체연합회가 선정한 '여성권익 발전의 디딤돌'로 선정됐다.

98년 2월 우조교 성희롱 사건 상고심의 주심을 맡아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우조교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

그가 내린 명판례 중에는 지하수 개발지역의 인근 주민들이 심각한 식수난에 처하자 '행정청의 허가가 적법하더라도 생활권을 인정해야 한다'며 주민들의 손을 들어준 판결을 비롯, 의료사고 사건에서 환자의 입증책임을 충분히 감안해 배상을 명한 판결, 실제 근로상황을 근거로 근로자의 범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 등 법률적으로 약자의 편에 서서 내린 판례들이 손꼽힌다.

최 지명자는 법조계내 인맥이 가장 적은 강원도 출신으로 처음 대법원장에 오르게 됐다.

장인이 호남 법조계의 대부인 고(故) 고재호(高在鎬) 대법관이고 손아래 동서가 서울고법의 곽동효(郭東曉) 부장판사인 법조인 집안이다.

두 사위는 서울지법 민사부의 나상용(羅相庸)판사와 '환란사건' 1심재판의 주심을 맡았던 형사부 호제훈(扈帝熏) 판사이고 아들은 군의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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