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전통마을을 찾아서-안동 하회마을

문화재의 보고, 삼남 4대길지의 한곳, 가장 한국적인 전통을 간직한 마을.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을 일컬을 때 어김없이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풍산류씨들이 고려말 부터 집성촌을 이뤄 숱한 명현거유를 배출한 곳이다. 하회(河回)는 낙동강물이 태극형으로 마을을 돌아 흐른다 해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과 들판, 절벽과 강 등이 조화를 이뤄 그 풍경이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이같은 지형 조건과 함께 대대로 세를 누려온 풍산 류씨들의 넉넉한 인심이 어우러져 단한번의 외침을 겪은 적이 없고 갖가지 민속과 학문을 바탕한 정신문화가 보존된 곳이다.

이곳 풍산 류씨 입향조는 고려말 전서(典書)를 지낸 류종혜(柳從惠)공이다. 풍산 상리가 고향이었던 류공의 조부 난옥(蘭玉)은 택지를 구하기 위해 하회마을 입구에 관가정(觀稼亭)을 짓고 아들 보(補)와 손자 종혜에 이르는 3대에 걸친 적선을 행한 후 하회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한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강거(江居)의 제일은 평양이요 계승(溪勝)의 제일은 하회'라고 극찬하고 풍수사들은 경주 양동과 봉화 닭실, 안동 천전 마을과 함께 최대 복거지(卜居地)라 했다.

마을 전체가 문화재(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돼 있고 징비록(국보 132호)과 양진당 충효당, 서애종손가 문서 등 헤아릴 수조차 없이 많은 문화유산이 전해 온다입향조로부터 6대에 이르러 운룡(雲龍.1539~1601)과 성룡(成龍.1542~1607) 형제가 났으니 운룡은 퇴계의 문인으로 풍기군수, 원주목사를 지냈으며 마을 부용대 절벽 서편에 겸암정사를 짓고 청빈히 살며 학문에 정진해 이름을 떨쳤다.

아우 성룡선생은 대제학, 대사간, 도승지 등을 거쳐 임란때 영의정으로 위기의 나라를 구한 명재상으로 유명하다. 충효당은 선생의 종가로 영모각이 지어져 유품이 보존되고 있다.

마을에는 송림제설(松林霽雪) 등 16경이 전해오고 인근마을의 각성 평민이 주도한 하회별신굿 탈놀이와 풍산류씨 선비들의 놀이였던 선유쥐불놀이는 마을의 안녕과 계급간 질서를 유지하던 역할을 한 것이었다.

안동민속박물관장을 지낸 류희걸선생은 하회마을을 이렇게 시로 읊고있다.

낙동곡류 하회땅은 조선제일 경승인데/정승나고 판서나고/명문거족 풍산류씨 휴수(休囚)없이 살아간다.

안동.엄재진기자 2000jin@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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