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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의 시와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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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1954~)

함박눈 펄펄 내리는 날 정육점 앞에

비닐옷 입은 지구인이 나타난다

냉동차 뒷문이 활짝 열리고 거기 도살된

대가리 없는 살덩어리들이

내장을 긁어낸 길짐승들이

지구인의 어깨에 척 걸려서 정육점 안으로 들어간다

함박눈에 핏방울은 뿌려지고

나도 먹고 사는 사람인지라

-중략-

함박웃음을 웃는 날도 있을 거라고

그 변덕스러운 길을

하늘을 탓하지 않으리라 중얼대면서

두 번 죽지 않는 그 날까지

걸어가 보기로 한다

(부분. 「회저의 밤」. 세계사. 1993)

받아들여야 하는 슬픔이란 무엇일까? 먹고사는 일을 하는 동안 "나도 먹고사는 사람인지라".

우리가 애쓰는 동안 슬픔은 가지런히 비밀을 만들어 간다.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들 속에만 있지 않다는 그 슬픔, 자신이 선택한 것들만 책임진다는 발화는 얼마나 인간적인가? 인간적인 것은 우리보다 나은 것의 일부가 되기 위해 우리가 애쓴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나도 먹고사는 사람인지라" 무언가의 죽음을 지켜볼 때가 있고, 그 누군가 죽어가는 걸 지켜만 볼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음이 기울면 이 시처럼 나도 한쪽으로 조금 기울어지면 좋겠다. 마음이 기울면 시가 되는 게 삶이라면 참 좋겠다. 그러다가 한여름에 덫에 걸려 혼잣말하는 토끼처럼 "하늘을 탓하지 않으리라 중얼대면서" 앞발을 핥고 싶다. "나도 먹고사는 사람인지라" 집 앞에 와서 앞발을 핥는다. 네가 사랑에 빠진 여자가 저 여자냐? 묻는다면 정육점에서 사랑을 시작하는 게 삶이라서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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