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른 아침에] 투표로 민주화를 할 수밖에

평양고등보통학교
평양고등보통학교'연세대(영문학)'보스턴대 대학원(철학박사) 졸업. 전 연세대 부총장. 현 태평양시대위원회 명예이사장

총선 여당 참변, 박 대통령 변화 기대

'통치' 마침표 찍고 '정치' 전념 계기로

유승민'주호영 청와대 찾아 당선 인사를

대통령 사과하고 친박-비박 담 헐어줘야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정치이념이요 정치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20대 총선을 지켜보면서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다. 왜 쉽다고 하는가? 선거 절차가 어려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라는 투표소를 찾아가 투표소에 나와 앉은 직원들에게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투표용지를 받아 두 군데 도장을 찍어 투표함에 넣는 일이 어렵지 않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런 간단한 절차로 큰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줄곧 과반수의 의원을 확보하고 오랜 세월 대한민국의 제1여당으로 자부하던 새누리당이 더불어민주당에게 일단 제1당의 자리를 내주는 참변을 당하니 '여소야대'가 눈앞에 전개된 셈이다. '선거의 여왕'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대통령 박근혜 설 자리가 어디멘고?

박근혜의 여당이 20대 총선에서 이렇게 참패하리라고 내다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도 박근혜인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민중 앞에서는 그의 '마법의 지팡이'도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무능하고 무기력한 19대 국회를 그대로 계승하는 20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박 대통령의 지나친 개혁의지가 정치판의 뇌관을 잘못 밟은 것이었다. 졸지에 박근혜의 여당이 풍비박산이 된 느낌이다. 국민도 다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박근혜가?" "어쩌다 저렇게?"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닌 것이다.

왜? 단숨에 123석을 차지한 더민주의 대표 노릇을 하고 있는 비대위의 김종인은 뚜렷한 이념이 있는 정치 지도자가 아닐 뿐 아니라 공산당만 아니라면 자기를 받아주는, 그리고 제대로 대접하는 정당이라면, 어떤 정당이라도 갈 수 있는 사람이고, 국보위에서 전두환을 도왔고 (그것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또 그 뒤에 그가 손을 잡지 않았던 정치 지도자가 누가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라. 그는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이명박, 박근혜를 다 거쳤고 더민주 문재인을 잡고, 곤경에 빠진 더민주를 움켜쥐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그 정체를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지만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손자라는 족보 때문에 누구나 일단 믿어주는 그런 인물이어서 이번에 (저도 놀라겠지만) 원내 123석을 차지한 거대 정당의 당수로 금의환향한 셈이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김종인이 더민주 내에 가진 발판은 취약하기보다는 아주 없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는, 20석 정도를 기대했던 국민의당이 40석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게 되어 놀란 안철수의 심정이 김종인의 심정과 비슷할 것 같다. 이미 안철수가 승리의 술잔을 여러 잔 마셨는지 벌써 얼큰하게 취한 듯, "국정교과서는 절대 안 된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보고 나도 "저 당의 앞날이 험난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종인이 "안철수의 저 당은 둘로 갈라지지 않겠는가"라고 예언한 것이 근거 없는 험담만은 아닌 것 같다. 박근혜의 새누리당이 앞으로 한동안 시련을 겪게 되겠지만, 여당을 맹공할 거대 야당들의 체질이나 생리가 어떻다는 것을 나는 알려주는 것뿐이다.

앞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이끌어나가는 대한민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대통령의 정책 스타일을 확 바꿀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통치'에 종지부를 찍고 '정치'에 전념할 계기를 찾은 셈이다. 대통령 자신이 친박과 비박 사이의 높은 담을 헐어주어야 한다. 공개적으로 하기가 민망스러우면 아무도 모르게 그 담을 헐면 더 좋다. 유승민, 주호영 등이 먼저 청와대를 찾아가 대통령에게 당선 인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해야 옳다. 불상사가 이한구의 잘못이었다 해도 사과는 대통령이 해야 한다. 이걸 계기로 대통령은 '친박'과 '비박'이 다 역사의 유물일 뿐 앞으로는 없다고 국민 앞에 선언해야 한다. 정당도 국회도 청와대도 모두 "자유민주주의 깃발 아래로 모이라"고 대통령은 한마디 외치기만 하면 된다.

비가 오면 오히려 땅이 굳어지는 법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투표로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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