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타고, 버스 타고, 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한참 걸어 엄마와 7살 소년이 할머니 집으로 간다. 형편이 어려워진 엄마는 아들을 잠시 친정에 맡기기로 한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외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신 시골 외딴집에 남은 소년. 2002년 개봉한 영화 '집으로'의 첫 장면이다.
전자오락기와 롤러블레이드의 세상에서 살아온 소년은 사방이 돌투성이인 시골집 마당과 깜깜한 뒷간에서 생애 처음으로 시련을 겪는다. 영화에서 소년은 시종 자신의 욕구불만을 외할머니에게 드러내며 괴롭힌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손자를 애정으로 보듬는다. 영화 말미에 엄마가 소년을 데리러 왔을 때 이별이 슬퍼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소년의 심통을 뜨거운 눈물로 바꾼 건 할머니의 사랑이었다.
어쩌면 '할매할배의 날'이 세상에 나오기 12년 전, 한 편의 영화가 조부모에 의한 손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알렸는지 모른다.
◆왜 지금 '격대교육'인가
자식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건 부모된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이다. 하지만 자녀교육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은 없다. 재력과 권력은 노력하면 웬만큼 얻을 수 있다지만 자식은 뜻대로 되지 않아서다. 현대의 핵가족화된 사회에서 자녀교육은 오롯이 부모의 몫이다. 그런데 가정을 이루기는 했지만, 자녀교육에 필요한 부모로서의 준비도 부족하고 먹고사는 문제로 맞벌이하느라 여건도 받쳐주지 못한다.
그래서 요즘은 조부모가 손주를 양육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한 세대를 건너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를 가르치는 것을 '격대(隔代)교육'이라고 한다. 손주를 향한 사랑과 훈육 사이에 객관적 균형을 유지하는 사려 깊은 교육이 조부모에 의한 교육이다. 부모는 자녀에 대한 과도한 욕심과 바람으로 아이를 감정적으로 대하기 쉬워 조부모의 절제된 너그러움과 경험적 지혜가 필요하다.
할아버지의 연륜을 바탕으로 아이는 단정한 옷차림부터 언행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적인 덕목을 익힌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조부모와 친밀감을 맺고 소통하는 게 이들의 인성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 이렇게나 중요한 격대교육이 우리 사회에서는 왜 이제야 이야기될까? 격대교육은 되살려야 할 전통이기보다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고령 인구의 빠른 증가를 특징으로 한다. 삶이 오래가는 건 축복이면서 동시에 여러 문제를 낳는다. 지난해 7월 통계청이 발표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 현황 및 전망'에 따르면 2015년 현재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노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3.1%이지만 2060년에는 40.1%로 높아져 세계 2위가 될 전망이다. 당연히 우리 사회는 생산력이 낮아진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빈약한 사회보장제도는 이렇게 많은 노인의 경제 여건도 사회지위도 보장해주기 어렵다.
하지만 노인들이 할 일은 의외로 많다. 그중 하나가 교육 문제다. 우리는 제조공장이 없어도 만들고 싶은 걸 만들 수 있는 3D 프린터 시대에 산다. 고도로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를 이용하는 인간의 도덕성이다. 도덕성이 없고 삶의 지혜가 부족한 채 문명이 진보하는 건 인류의 재앙에 다름없다. 이 부분에서 격대교육은 현대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중요한 키이다.
격대교육이 일반화되면 자연스레 뒤처져 있던 노인의 위상도 올라간다. 후세대의 도덕과 인성교육에 들어가는 국가 또는 사회의 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 고독과 무료함 등 노인이 겪는 사회문제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겨나 해결된다. 더욱이 가정도 화목하며 건강해진다. 돌 하나로 새 두 마리를 잡는 게 아니라 네 마리를 잡을 수 있는 셈이다.
윤용섭 한국국학진흥원 부원장은 자신이 공동집필한 '노인이 스승이다'라는 책에서 "노인은 지금 젊은이의 미래다. 노인이 힘차고 평안해야 청소년의 마음도 든든하고 장래의 희망을 품을 수 있다"고 했다. 건강한 노년이 많아질수록, 그리고 그들로부터 격대교육을 받은 청소년이 많아질수록 과학기술이 고도화되고 늙어가는 우리 사회에 힘이 될 수 있다.
◆격대교육 어떻게 해야 하나?
과거에는 명문가든 아니든 대가족을 이루고 사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손주들의 교육은 조부모가 맡는 게 당연했다. 그때는 어떻게 격대교육을 해야 할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본 대로 배운 대로 하면 되는 법이었으니까. 이제는 격대교육의 전통이 끊겨 도통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를 수도 있다. 살아있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격대교육의 참모습은 퀴리가에서 찾을 수 있다. 노벨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퀴리가에서는 할아버지 외젠 퀴리 박사가 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는 아들 피에르에 이어 손녀 이렌까지 노벨상을 타게 만들었다. 피에르 퀴리 부부는 딸 이렌을 낳자마자 요즘 맞벌이 부부가 겪는 것과 비슷한 고민에 빠졌다. 경제사정이 좋지 못해 부부가 공동으로 실험을 계속하기 어려웠던 것.
그때 피에르의 어머니마저 암으로 숨을 거두자 홀로 남게 된 외젠이 피에르와 함께 살게 됐다. 며느리인 마리가 실험실에 있는 동안 자연스레 외젠이 이렌을 돌봤다. 의사인 외젠은 손녀가 정신적으로 안정된 아이로 자라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빅토르 위고와 에밀 졸라 등의 작품으로 문학적 소양을 키워줬다. 또 식물학과 박물학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갖도록 유도했다.
이 이야기에서 격대교육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젊은 부모의 이해와 조부모의 적극적인 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피에르와 마리 부부는 외젠의 손녀 양육 방식에 대해 이해하고 믿고 맡겼다. 외젠 역시 손녀를 기르는 데 조금의 소홀함 없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격대교육은 이렇게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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