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그믐달이 보고 싶다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새해를 맞으면 누구나 새로운 목표를 하나쯤 세운다. 작심삼일이 되기 십상이란 걸 알면서도 그 어리석은 일을 매년 되풀이한다. 심리학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잘못된 희망증후군'(The False-Hope Syndrome)쯤 되겠다.

올해 스스로 품었던 소망은 책 읽기였다. 소박하게(?) 일주일에 한 권으로 정했다. 황폐해진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단비가 되리라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애당초 비현실적 목표였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유년 달력 첫 장을 넘기기 전까지 한 권이라도 독파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핑곗거리야 많지만 지금 손에 쥔 책이 시간 때우기에 적당한 추리소설이란 대목에까지 이르면 부끄럽기까지 하다. 이놈의 의지박약!

아직 절반도 읽지 못한 책 이야기를 꺼낸 건 소설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에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이란 영화 이야기가 나와서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이후 국내 언론에서도 식상하리만치 자주 언급한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 취재기를 토대로 1976년 제작됐다.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소설 속 사회부 기자들의 회고처럼, 영화 개봉 직후에는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청년들이 넘쳐났다고 한다.

언론을 영웅으로 묘사한 영화는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스포트라이트'(Spotlight)도 그 가운데 하나다. 미국 동부지역 유력지, 보스턴 글로브의 탐사보도팀 '스포트라이트' 소속 기자들이 지역사회의 추악한 이면을 고발한 실화가 모티브다. 특히 보도를 만류하는 취재원을 "이걸 안 쓰면 뭘 쓰냐"며 설득하던 장면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자는 '기레기'가 됐다. 신(信)'예(禮)'절(節)'지(智)의 덕(德)이 있다고 해서 혼례에서 신랑 신부가 주고받는 그 기러기라면 좋으련만, 그냥 쓰레기라는 비아냥이다. 비단 한국에서만 빚어지는 현상도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언론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정직한 인간들"(the most dishonest human beings)이라며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동병상련이라 하기에는 너무 씁쓸하다.

물론 언론인을 지칭하는 단어가 기레기가 된 건 자업자득 측면이 크다. 요즘 읽는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이 유괴 사건을 취재하다가 멀쩡히 살아 돌아온 피해자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치명적 오보를 낸다. 세월호 대참사를 계기로 한국 언론이 당분간 떨쳐내기 힘든 불명예를 안은 데 비할 바는 아니나 저널리즘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원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문득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들었던 '악담'이 생각난다. 몇 년 전 정치부에 몸담았다고 했더니 대뜸 "정호성을 아느냐. 얼굴이 닮았다"는 인사가 되돌아왔다. 맞다. 지난주 재판에 나와 "대통령 지시로 최순실에게 청와대 문건을 전달했다"고 자백한 그 청와대 전 부속비서관 말이다.

초면에 다소 황당한 질문을 받으면서 소름 돋았던 건 개인적으로 정 전 비서관과 동문수학한 사이여서인 것도 있지만 말 뒤에 숨은 '의도'를 느꼈기 때문이다. '악담'이란 표현을 쓴 것도 그래서다. 정치부 기자라면 자연스레 '문고리 권력'에 빌붙어 꽃길을 걸으려 애쓰지 않았겠느냐는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업보(業報)로 받아들일 수밖에….

내일은 섣달 그믐이다. 음력으로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맑은 날씨라도 달을 보기 어려운 날이기도 하다. 나도향 선생의 수필처럼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움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 아니면 보아주기 힘든 달'이다. 새해 언론의 숙명도 그래야 할 듯싶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