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중국에 갔었다. 연변의 한 소학교 교사들과 동행하여 개산문이라는 꽤 큰 두만강변 도시에서 상류쪽으로 한 20분쯤 가다보니 건너편에 제법 번듯한 북한 마을이 나타났다. 마침 두 아낙네가 불과 2백m밖에 안떨어졌을 강건너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 옆에서 아이들이셋 족대로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 몸짓들이 마치 슬로우비디오 속의 그것처럼 느린 것을 육안으로도 볼 수 있었다. 동행자가 가지고 온 망원경을 받아 눈에 대니 그들의 바짝 야윈 얼굴과 남루한 옷도 확연히 드러났다. 여인네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고 이따금 생각난듯이 빨래를 물에넣고 흔들었다. 아이들도 고기를 좇아 움직이기보다 멍하니 서 있기를 더 많이 했다. 여인네나 아이들이나 한가지로 옷은 군데군데 해져 있었고 때가 꼬질꼬질 묻어 있었다. 그때 언덕을 넘어 여섯명이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지게를 진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의 걸음은 서 있는것인지 걷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느렸다. 이곳은 국경 마을이라 보는 눈이 있어 그래도 나은 편일 터인데도 못먹어 저 꼴이라며 사촌 여럿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여교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마을은 한 30여호 돼 보였는데 텅 빈 것처럼 조용했다. 마당 평상에 꼼짝 않고 앉아 이따금 파리라도 쫓듯 손을 내젓는 늙은이 하나가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거기서 다시 한 30분 가서 삼합진의 뒷산에서 바라본 북한의 공업도시로 알려져 있는 회령은 그대로 유령의 도시였다. 2, 3만이라면 적은 도시가 아닐 터인데 거리에는 차 한대 사람 하나가 없고, 공장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연료가 없어 공장이 돌지 못하자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부속을 빼 강 간너에 갖다 팔아 공장은 폐허가 돼 버렸다는 것이다. 우리가 뒷산에 머문한 시간 동안 중국쪽에서 트럭 두대가 다리를 건너 들어간 것이 도시의 움직임 전부였다. 수해만아니었더라도라는 내 탄식에 동행한 교사들은 일제히 어림없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수해가 들기훨씬 전인 80년대 중엽부터 두부 한 모, 고기 한 칼 제대로 못먹는 가난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특히 일행 가운데는 90년대초 두번에 걸쳐 무용반 학생들을 데리고 공연차 평양과 금강산을 다녀온 여교사가 있었는데, 그때 이미 평양시민들은 종이조각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깨끗한 평양거리와는 딴판으로 옷은 후줄근하고 눈에는 생기가 없으며 허리는 굽고 얼굴은 흙빛인 것이 못먹은빛이 역력하더라고 말했다.
그날 동행한 교사들은 모두 북한에 한두집 친척을 갖고 있었다. 그곳이 고향이기도 해서이지만,그들의 삼촌 당숙 가운데는 조선의 항미전쟁(6·25전쟁을 그들은 이렇게 부른다) 때 북을 지원하러 갔다가 주저 앉은 사람, 그 뒤의 전후 복구에 참여하여 그대로 북한의 주민이 된 사람들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대약진 운동으로, 그 뒤의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국민이 굶주림에 시달릴 때 북한 동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한 그들은 모두 북한의 가난이 수해에서가 아니라 구조에서온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개방 개혁 없이는 결코 북한의 주민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말하고 있었다.
북한의 개방 개혁을 도울 수 있는 것은 남한뿐이라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기도 했다. 남한이 조건없이 북한을 도우면 위에서 아무리 감추려해도 결국은 주민이 알게되고, 그것이 개방 개혁의 불씨가 되어 더이상 굶어 죽는 일도 없게되지 않겠느냐고 그들은 말했다. 북한을 김일성 부자가 군림한 나라라는 이미지로 보지 말고 내 사촌 내 당숙이 같은 말을 쓰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사는고장으로 보아달라는 말이었다. "저 고기 잡는 아이들 다 굶어 죽으면 어쩌지요?" 두만강을 떠나며 두번 북한을 다녀왔다는 여교사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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