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인터넷으로 내몰린 아이들

얼마전 늦은 밤에 안식구가 고등학교 일학년인 딸아이의 영어숙제를 돕고 있었다. 안식구가 중학교 영어선생이었으므로, 우리집에선 늘 있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여느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살펴보니, 안식구는 열심히 사전을 뒤지고 있고, 딸아이는 양손으로 턱을 괸 채 제어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책상 위에 놓인 인쇄지를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면접시험을 받는 요령을 설명한 책에서 한 장을 뽑아놓은 것이었다. 거기 나온 글들은 물론 구어체였고, 미국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쓰지만 우리나라 영한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낱말들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대학생들도 해독하기 쉽지 않을 만큼 어려웠다.

어이가 없어서, 나는 딸아이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것은 어디서 났느냐고. '수행평가'를 위한 숙제인데, 영어선생님이 인터넷에서 뽑은 것이라는 대꾸가 나왔다. 시간이 늦었으므로, 나는 딸아이에게 그 글을 우리 말로 해석해 주었고 녀석은 열심히 적었다. 숙제가 끝나자, 나는 안식구에게 참았던 분통을 터뜨렸다. 도대체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들에게 대학생들도 힘들 영어숙제를 내는 선생은 어떤 사람이냐고.

그러자 학교 사정을 잘 아는 안식구는 교사들의 딱한 사정을 설명했다. 무시험 입학은 고등학교 3년동안의 수행평가를 전제로 하는데, 구체적 지침들이나 자료들이 전혀 없이 수행평가를 시작했으니, 오죽하겠느냐고. 이번 숙제만 하더라도, 한 반을 아홉조로 나누어 숙제를 냈다니, 몸짓 언어에 관한 자료들을 아홉가지나 뽑았을 터라고.

그 뒤로 나는 딸아이의 숙제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고 사정은 다른 과목들에서도 같다는 것을 알았다. 교사들이건 학생들이건 자료들의 대부분을 인터넷에서 얻고 있었다. 그 자료들은 물론 영어로, 내용의 이해를 떠나, 영어를 해석하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도서관에서 우리 말로 된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면 좋을 터이지만, 도서관들이 적은 데다가 거기 모인 자료들도 부실하다.

우리 말로 되어있거나 번역된 책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원천적 문제도 있다. 그래서 단계적으로 잘 설계된 영어 교과서로 영어를 익혀야 할 학생들이 거칠고 어려운 영어 문장들에 막혀 애를 먹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고등학교 일학년 학생을 둔 집마다 벌어지는 풍경이다. 중학생들을 둔 집들에서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교사들도 모두 '수행평가'에 시달리고 있다. 결과도 좋을 리 없다. 사람의 의욕을 꺾는데는 능력에 넘치는 일을 맡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 혼자선 도저히 할 수 없는 숙제들을 받은 학생들은 지식을 얻는게 아니라 공부할 의욕을 잃는다.

물론 이 문제의 뿌리는 깊다. 근본적으로,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공급보다 훨씬 많고 모두 보다 나은 대학교들에 들어가려고 애를 쓰는 상황에서 '무시험 입학'은 가장 치열한 경쟁을 불러 온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현 정권의 잘못을 탓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안내판들이 낯선 언어로 씌어진 인터넷이라는 땅으로 갑자기 내몰린 우리 아이들을 도와주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이다.교사들이 '수행평가'를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침들과 자료들을 마련하는 일은 지금 아주 중요한 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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