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재일교포 100년-(3)비밀 귀국

로봇
mWiz 이 기사 포인트

1945년8월6일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도 원폭 세례를 받은 일제는 8월15일 무조건 항복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야 일본 정부는 차관회의를 통해 조선인의 징용해제를 결정했다.

일본은 정책적으로 조선인들을 강제연행했으므로 당연히 일본 정부의 책임 아래 그들을 조국으로 보내 줄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지방장관 앞으로 단 한통의 정부 공문 연락만 있었고 현(懸)지사들은 관내 사무소에 대해서 부산까지 인솔해 가도록 지시했다.

각 지방 관리들은 그들이 자행한 과거의 가혹한 처우에 대한 보복을 두려워 해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조선인들을 귀국선까지 인솔하는 것을 두려워 했다.귀국선이 출항하는 하카다(搏多)항구까지만 이들을 인솔하고 곧바로 돌아가 버렸고 조선인들은 그들 스스로 배편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승선권을 기다리며 해안가 창고나 민가의 처마밑에서 취사를 해결하며 노숙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이들의 배설물로 일대는 악취로 뒤덮였다.

하루에 1회의 선편으로 1천명을 보낸다 해도 그곳으로 몰려드는 동포들의 숫자는 더욱 많았다. 일본 후생성 자료에 의하면 10월 중순이 되자 하카다항구에는 매일 2천500명 이상이 도착해 귀국선을 기다리는 숫자는 11월에 1만5천명, 12월에는 2만5천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부산 일대에서 발생한 콜레라는 많은 사망자를 내며 확산되고 있었다. 또한 홍수에 의한 철도 피해가 속출하고 있어 일시적으로 송환이 중단되자 귀국선을 기다리는 동포들의 숫자는 늘어나기만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불법 귀국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의 송환 계획과는 별도로 비밀리에 엄청난 금액의 승선료를 받고 하루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는 이같은 방법으로라도 귀국하려는 동포들이 많았다. 정원 20명 정도의 조그만 어선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채워 넣기도 했다. 또한 일각이라도 빨리 돌아가려는 마음에서 기상 조건도 무시하고 출항하는 경우도 많았다. 출항후 얼마 못가 침몰하는 사고도 속출했다.

기타규슈(北九州)시에 살고 있는 서대석(徐大錫)씨는 "가재도구를 팔아 이 배의 표를 구입했다. 약속된 출발일 한밤중 해안 창고안에서 하얗게 DDT가루를 뒤집어 쓰고 승선장소에 모였는데 태풍이 올라와 출발할 수 없다는 선장의 한 마디에 귀국의 기회는 없어져 버렸다"고 증언했다.

제국주의 일본의 잔악한 '인간 공출'로 끌려간 우리 동포들은 일본 정부의 방치에 가까운 귀국조치로 오갈데 없이 그대로 일본에 눌러 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래서 많은 재일교포들이 생겨난 것이다.

朴淳國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