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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선생 미공개 서간 '나의 사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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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이 미국유학을 떠난 2년 뒤인 1904년부터 타계하기 전까지 가족에게 쓴 편지들이 공개됐다.

인제대 박재섭 교수와 미국 웨스틴 워싱턴대 김형찬 교수는 도산 선생의 딸 안수산 여사가 간직해온 미공개 편지를 엮은 '나의 사랑 혜련에게'(도서출판 소화)를 책으로 출간했다.

모두 126통에 달하는 이들 편지는 선생이 부인 이혜련 여사와 필립 등 다섯 자녀에게 보낸 것으로,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 등이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또 민족학교를 3개나 세웠던 그가 정작 자녀들의 학비를 마련하지 못해 입양까지 고려해야 했던 안타까운 심경도 피력했다.

1904년 3월 25일 보낸 편지는 "나의 사랑하는 혜련이여, 일간은 몸이 어떠하며 과히 궁금치 아니하오잇가?"로 시작해 각별한 사랑을 아내에게 전했다. 첫 미국 체류를 마치고 귀국하던 1907년 1월의 편지는 "이 세상에 자기 나라를 위하여 죽는 남자도 많고 여자도 없지 아니하니 이때를 당하여 우리가 죽음도 사양치 아닐 터이어늘 어찌 서로 이별하며 고생하는 것을 한탄하리오"라며 비장한 석별의 정을 표현했다.

도산 선생은 평생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면서 집안일을 돌보지 못함에 대해 가장으로서의 안타까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던 해인 1910년 10월 19일에 쓴 편지에서 "나는 항상 몸이 나라일에 매여서 가사를 돌아보지 못함으로 집안식구가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것도 염려하거니와 내가 스스로 집을 위하여 돈을 벌지 못함으로 장차 아이를 교육할 힘이 없을까 염려하나이다"고 적었다.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선생의 가족애는 애처러울 정도로 간절했다. 1919년부터 1924년에 이르는 상해임시정부 시기에 쓴 편지들에서는 동포들의 사랑과 믿음을 봐서라도 자신을 희생할 수 없다고 다짐하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슬퍼하는 일도 잦았다.

선생은 1921년 7월 14일자 편지에서 "오! 혜련! 나를 충심으로 사랑하는 혜련!나를 얼마나 기다립니까? 나는 당신을 보고 싶은 생각이 더욱더욱 간절하옵니다. 내얼굴에 주름은 조금씩 늘고 머리에 흰털은 날로 더 많아집니다"며 격한 감정을 쏟아냈다.

그러나 이상촌 건립을 위해 중국 일대를 돌아다니던 도산 선생은 1932년 1월 6일자와 16일자 편지에서 가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함께 혁명에 자신의 최후를 바칠 수밖에 없노라고 심경을 비교적 담담히 토로했다. 선생은 "나는 처자에게 한 죄인이란 고통의 생각이 아직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면서도 "여러 동지와 동포들에게 빚진 것이 많고 지금은 늙었으니 다시는 집이나 무엇이나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여지가 없고 오직 혁명을 위하여 최후로 목숨까지 희생할 것을 재촉할 것뿐입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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