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개방 10년 격랑의 동유럽-(상) 헝가리 부다페스트

89년 9월 10일. 헝가리 정부는 과거 독일과의 역사적 구원(舊怨)을 잠시 접어두고, 동독인에 대한 무비자 입출국을 허용하는 용단을 내렸다. 헝가리의 국경개방은 역사적인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유럽 개방'의 도화선이었다. 그로부터 꼭 10년. 철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동구(東歐)국가들의 '개방 도미노'는 이제 '재건의 부메랑'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변화와 자유의 물결이 휘몰아친 동유럽 국가들의 지난 10년의 명암을 되돌아보고, 사회·문화적 변화상을 몇차례 나눠 살펴본다.편집자주

어둠이 짙게 내린 두나(다뉴브)강. 고도 부다의 언덕 위에 우뚝선 왕궁과, 부다와 페스트를 연결하는 란쯔 다리 등에는 하나 둘 환한 조명이 밝혀진다. 그 빛에 다뉴브의 잔물결마저 고스란히 드러나고, 초가을 쌀쌀한 강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의 등뒤로 갑작스레 화사한 불꽃들이 피어 오른다. 언뜻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가 머리를 스친다. 잠시 의아해 하는 이방인들의 표정이 이내 미소로 바뀌고, 끄덕이는 머리가 눈에 들어온다.

지난 9월 10일 저녁무렵 부다페스트의 주요 다리와 도로의 교통은 완전 차단됐다. 동구 개방의 초석을 놓은 헝가리의 국경개방 10년을 축하하는 불꽃놀이와 기념행사가 곳곳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를 비롯 헝가리 미클로시 네메트 전 총리, 89년 당시 통행 자유조치를 협상했던 줄러 호른 헝가리 전 외무장관 등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정치지도자들이 부다페스트에 모였다. "독일통일에 기여한 헝가리의 결정에 감사한다"며 고개를 숙인 슈뢰더 독일 총리의 모습도 비쳐졌다.

당시 헝가리 정부의 국경 개방 발표 3일만에 1만5천명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 몰려 베를린 장벽을 우회해 서독에 안착했다. 동독인들의 대량 국외탈출은 동독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의 몰락을 가속화시켰고, 결국 중동부 유럽의 사회주의 체제가 차례로 무너진 것이다.

헝가리의 지난 10년은 동구의 급격한 변화의 상징으로 통한다. 헝가리도 개방 이후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면서 극심한 과도기적 진통을 겪었다. 경제성장은 마이너스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94년부터 서서히 플러스로 전환, 지난해는 4%대의 성장과 1인당 GDP 5천300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또 체코, 폴란드와 함께 지난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에서 서유럽 군사동맹으로 변신했다. 이와 함께 지난해 11월 개방의 선두주자인 체코, 폴란드와 함께 2002년 유럽연합(EU) 가입을 목표로한 협상도 시작했다.

이같은 민주화와 자본주의 체제로의 전환은 헝가리의 지도를 바꿔놓았다. 무엇보다 북적이는 관광객은 변화를 실감케 한다. 헝가리인들에게 '관광'은 최고의 상품이라는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닫혔던 문이 열리면서 고도 부다페스트에는 연일 수많은 관광객들이 서유럽 등지에서 몰려들고 있다. 과거 화려했던 헝가리의 문화와 유서깊은 유적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려는 것이다.

130년전 이미 도시 계획을 완성한 부다페스트는 각국의 도시공학 학도들이 필수적으로 찾아보는 코스다. 하나 둘 껍질을 벗고 있고 헝가리의 진면목이 드러나면서 헝가리 정부도 관광객 유치 노력을 본격화하고 있다. 그 결과 연일 관광객을 태운 각국의 버스들이 도심을 메우기 시작했다. 한해 헝가리를 찾는 관광객수는 모두 3천500만명으로 추산된다. 다뉴브강 주변에 산재한 왕궁과 국회의사당, 성당, 요새 등 주요 유적지들은 일몰 후 화려한 조명을 밝힌다. 과거 제한적으로 야간조명을 해오다 이제는 완전히 파리 센강 분위기를 닮아가고 있다.

세계 유명 디자이너들의 부티크가 도심에 하나 둘씩 문을 열었고, 헝가리 민속품을 파는 상점들도 연일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노상 카페에서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는 부다페스트 사람들의 모습에서 개방의 실상이 강하게 느껴진다. 마치 뮌헨이나 파리, 빈의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철거된 공산체제하 영웅들의 동상은 동상공원의 전시물 신세로 전락한지 이미 오래다.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설 현장. 지금은 어수선하지만 헝가리 경제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증거다.낡고 우중충하던 건물들에 손을 대고, 화사하게 단장하면서 사회주의 체제하 방치됐던 부다페스트는 이제 한껏 기지개를 켜고 있다.

우리와는 89년 3월 수교, 현재 헝가리에는 상사 주재원, 유학생, 선교사 등 300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 우리나라 상품 판매도 호조를 보이고 있다. 대우와 현대, 기아 자동차 3사가 지난해 헝가리에서 판매한 대수만도 8천800대 정도. 지난해 수교 직전 헝가리에 정착, 헝가리인들의 살림살이를 지켜봐온 김홍식 선교사는 "현재 국유재산 95%가 사유화됐고 싼 물가와 인접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은 생활 여건 등 자유시장 경제체제가 정착되어 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럽집행위원회가 동유럽 국가 중 개혁의 속도, 폭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로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베니아, 에스토니아 등 5개국을 꼽고, EU가입 1차 후보국으로 선정한 것도 이같은 현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정과 빈부 격차 등 개방의 후유증도 눈에 띈다. 라요스 시미츠카 관세국장이 정치적인 이유로 취임 1년만에 사임했다는 보도는 최근 현지 언론의 관심거리다. 지난 3개월새 정적에 의해 부친과 장인을 잃고, 사임압력을 받아 결국 하차한 그의 모습에서 불안한 정치 상황이 감지된다. EU 가입을 위해 정부재정의 건전화, 부정부패의 척결, 금융분야의 구조조정 등 대책 마련도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

이런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 산적한 과제는 개방 후 헝가리가 안고 있는 또 다른 고민이기도 하다. '다뉴브의 진주'로 불리는 고도 부다페스트. 옅게 깔린 구름사이로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부다페스트의 가을은 맑고 투명하지만 아직도 갈 길은 멀고 바쁘다.

부다페스트에서 徐琮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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