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집 주변 골목 어귀를 돌아서면 국화빵 장수가 있었다. 드럼통으로 만든 연탄불 화덕 앞에 서서 그가 국화빵을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허기가 절로 느껴지곤 하였지. 따끈따끈한 국화빵을 베물었을 때 혀끝에 닿던 팥고물의 달콤함을 떠올리며 바라보던 국화빵 장수의 모습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기억에 생생하다. 요즈음처럼 먹을거리가 다양하고 풍요롭지 못했던 그 시절 국화빵은 정말로 대단한 먹을거리였다. 주물로 된 시커먼 빵틀에 묽은 밀가루 반죽을 넣고 얼마간을 익힌다. 이어서 밀가루 반죽 안에 팥고물을 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뒤집는다. 다시 얼마간을 익히면 먹음직스러운 국화빵들이 만들어지곤 하였지.
갑작스럽게 웬 국화빵 타령인가.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의 영문과에 지원한 학생들이 나에게 국화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내 기억에 떠오른 국화빵은 어린 시절 혀끝을 즐겁게 하던 따끈따끈한 그 국화빵이 아니다.
식고 쭈그러들어 풀떡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 맛없는 국화빵이 내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다. 풀떡이나 다름없는 것으로 변해 버린 국화빵이라니?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새 천년을 맞이하여 국제 경쟁력을 기르기 위한 영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에 보다 깊이 있는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로 시작되는 학생들의 천편일률적인 지원 동기가 나에게 그런 모습의 국화빵을 떠올리게 했던 것이다.
혹시 읽어 본 문학 작품이 있냐고 묻는 경우에도 학생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입학 시험 공부 때문에 시간이 없어 읽어 본 문학 작품이 없다는 대답이 어찌 그리도 많은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오로지 입시 공부만 했단 말인가. 어쩌다 작품 명을 몇 개 대는 학생들도 있다. 그러나 거의 예외 없이 줄거리는커녕 작중 인물의 이름 하나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읽은 적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읽지 않고 읽은 척하는 것은 아닌지?
틀에 찍혀 나오는 국화빵처럼, 오늘날 우리 나라의 청소년들은 오로지 대학 진학이라는 틀에 맞추어 교육된다. 물론 국화빵을 찍어내는 것과 다름없는 교육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누구나 알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해결책을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내후년인 2002년부터 시행하기로 하고 교육부가 내놓은 새로운 대학 입시 방안이라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해결책을 찾기 위한 것 가운데 하나이리라. 그러나 "공부 안 해도 대학 간다"는 묘한 논리를 부추기는 가운데 새로운 대학 입시 방안조차도 또 하나의 틀이 되고 있다. 그것도 공부 이외에 어떤 것이라도 잘하면 대학을 갈 수 있다는 아주 나쁜 틀이. 이제 팥고물조차 들어 있지 않은 국화빵, 또는 국화빵의 모습을 한 풀떡이 양산될지도 모를 판국이 되었다.
무엇이 문제이며 어디에서 해답을 찾을 것인가. 나 역시 이 물음에 대해 시원한 답변을 할 수 없다. 다만 지원 동기를 묻는 물음에 "세계화와 정보화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새 천년을 맞이하여"로 시작되는 피상적 답변만을 유창하게 늘어놓도록 학생들을 유도하는 교육이 아닌 교육, 문학 작품이든 무엇이든 실제로 읽고 느낀 바를 어눌하게나마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으리라는 말밖에는. 문제는 그런 교육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있다.
무엇보다도 대학 진학만을 위한 교육이 아닌 교육, 학생들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판단하도록 돕는 교육을 용납하고 장려하는 사회적 공간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인문학 본연의 인문학 교육이 우리 교육에 특히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무엇 하나라도 잘 하면 대학 간다는 논리가 단순한 기능인이나 기술인을 국화빵 찍어내듯이 양산하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 교육에서 미래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인재 양성이 어디 국화빵을 찍어내는 일과 같아서야 되겠는가. 그것도 팥고물이 빠진 국화빵을.
〈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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