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후 옛 고려 왕족에게 온건책을 취했던 태조는 1394년(태조 3년) 4월 20일 태도를 바꿨다. 일부 고려 유신들이 왕씨와 결합해 신왕조의 미래에 대해 거짓말을 퍼뜨리는 것이 발각되고 나서였다.
태조는 원주로 유배시켰던 공양왕을 공양군에 봉해 간성으로 더 멀리 보내기만 했다. 고려 태조의 묘 숭의전은 경기 마전으로 옮기면서 폐왕의 동생과 아들로 하여금 다른 7왕의 묘와 같이 모시도록 조치했다. 그 밖의 왕씨 일족들은 강화도와 거제도로 이주시킨 뒤 나중에는 이들을 등용시킬 방침까지 세웠다.
그러다가 모략이 발각되자 이들을 처분하기 위한 강경책이 실행됐다. 이 날 간성에 있던 공양군과 그의 아들을 교살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출륙(出陸)이 허용됐던 왕씨들은 다시 섬으로 추방됐다. 그 중 일부는 해상에서 배를 침몰시켜 죽게 했다. 내륙에 숨어있던 일족들은 색출한 뒤 처단해 고려 왕조의 왕손들을 거의 멸족시켰다.
이러한 살벌한 기운이 가신 것은 태종조에 이르러서였다. 사회가 안정되면서 후환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공양군을 다시 왕으로 추존했고, 왕씨 잔족들에 대한 탄압도 중지했다. 고려 유신들은 포섭을 추진해 벼슬까지 주기도 했다.
한 왕조가 쇠하고 다른 왕조가 흥하면서 불었던 피의 바람은 잠시 멈추는데 불과했다. 그 바람이 다시 일어 잠잠해지기까진 숱한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1902년 퀴리 부부, 방사능 물질 라듐 분리 성공 ▲1907년 고종 밀사단 3명, 만국평화회의 참석 위해 출발 ▲1999년 미국 컬럼바인 총기난사 사건.
조문호기자 news119@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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