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장사(茸長寺)는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있었다. 절은 없어지고, 석불좌상, 삼층석탑, 마애여래좌상 등이 산재해 있다고 소개되어 있으나 대단하다고 할 것은 아니다. 경주 남산이 성지이게 하는 수많은 불교 유적지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아 찾는 사람이 드물고 거의 잊히다시피한 곳이다.
용장사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은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덕분이다. 남산의 다른 이름이 금오산이다. '금오신화'는 "금오산에서 지은 새로운 이야기"라고 일컬은 소설집이다. 지어서 바위 속에 감추어두고 알아줄 사람을 기다린다고 하던 것이다. 망실되었다가 가까스로 전해져 다시 읽을 때마다 놀라움을 안겨준다. 망각과의 싸움으로 진행된 작품의 발견과 평가가 이제는 널리 인정되는 결말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창작의 현장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산 일주 등산로를 한참 걷다가 내려올 수 있으나 지루할 것 같았다. 울산으로 향하는 국도변 용장리에서 시작해 용장골을 더듬어 올라가는 쪽을 택하니 올라갈수록 가파르다. 고난에 찬 삶을 되짚는 길이 험한 것은 당연하다. 시련을 겪지 않고서 김시습이 머물렀던 곳에 다가갈 수는 없다.
김시습은 승려가 되어 전국을 방랑하다가 28세 때인 1462년에 경주에 이르렀다. 용장사에 거처를 정하고 한 동안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시 몇 편에서 그 때의 심정을 나타냈다. "용장산동요 불견유인래(茸長山洞窈· 不見有人來·용장산 골짜기가 그윽해 오는 사람을 볼 수 없구나)라는 말로 시작되는 시에서, 고요함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밖에 나갔다 돌아오면서 "금오산봉시오려·순궐향비요야소(金鰲山峯是吾廬·筍蕨香肥饒野蔬·금오산 봉우리가 내 오두막인데, 죽순과 미나리 향내 나고 살쪘으며 야채가 풍성하다)고 했다. 숨어 지내기 좋은 곳에 거처를 정하고 꿈을 펼쳤다.
김시습은 한미한 무반 집안에서 태어나 지체가 낮았으면서, 어려서부터 재능이 놀라워 기대를 모았다. 문필과 식견에서 높은 경지에 이른 인재가 무반 노릇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부조화였다.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했다는 말을 듣고 책을 불살라버리고 세상을 등진 채 방랑의 길에 올라 승려 노릇을 했다.
그 때문에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꼽혔지만, 단종에 대한 충절이 그런 행동을 한 기본 동기라고 할 수는 없다. 왕위찬탈 사건 같은 것이 없었다 하더라도 자기 재능에 상응하는 인정을 받기 어려운 처지여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정신적 안정을 찾기 어려운 성격 또한 문제였다. 서울에 들렸다가 어린아이들의 조롱이나 받는 미친 승려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 떠나가야만 했다.
만학천봉외(萬壑千峰外)만 골짜기 천 봉우리 밖에서
고운독조환(孤雲獨鳥還)고독한 구름 외로운 새가 돌아온다.
차년거시사(此年居是寺)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내지마는
내세향하산(來歲向何山)오는 해에는 어느 산으로 향할까?
풍식송창정(風息松窓靜)바람이 자니 송창이 고요하고
향소선실한(香銷禪室閑) 향이 스러져 선실도 한가롭다.
차생오이단(此生吾已斷)이번 삶을 나는 이미 단념했기에
서적수운간(棲迹水雲間)발자취를 물과 구름 사이에만 남기리라.
'만의'(晩意)라고 한 시이다. 승려의 거동이어서 아무 데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했다. 삶에 대한 기대를 버려 애착을 가져야 할 것도 없다. 그래도 방랑하는 신세가 한탄스럽기에 또 한 해를 보내는 심정을 쓸쓸하게 술회했다. 온갖 영화를 누리면서 이따금씩 산수를 찾는 시에서는 찾기 어려운 진실과 밀도를 갖추었다.
시를 지어 불만을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무엇이 진실인가 찾아 나섰다. 새로운 이치를 발견하려고 분투하는 탐구자가 되었다. 누대에 걸쳐 벼슬을 하는 관인(官人) 문학, 은거해서 유학의 도리를 섬기는 사림(士林) 문학과는 다른 방외인(方外人) 문학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했다.
"방외의 선비가 도리를 독실하게 지키지 않고 뜻을 확고하게 세우지 않는다면, 굶주림이 내 목숨을 버리기에 알맞고 궁박함이 이 삶을 망가뜨리기에 족할 뿐이다. 어찌 시냇물을 손으로 움켜 마시면서 임금의 부름을 우습게 알고, 명아주 풀을 뜯어 먹으면서 일생이 즐겁다고 만족하겠는가?"
'산림'(山林)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외인은 세상의 법도를 거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대안이 되는 가치관을 분명하게 밝힌다고 했다. 올바른 도리를 깨닫고 실천하려고 가난을 참고 견디면서 임금의 부름을 우습게 여길 수 있다고 했다. 탐구자의 사명과 보람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한다고 했다.
추구하는 도리가 어느 한 가지로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스스로 신세모순(身世矛盾)이라고 일컬은 갈등을 여러 표현방식을 사용하면서 문제 삼았다. 불교·도교·유교의 글쓰기를 모두 시험했다. 그렇게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욕구를 소설로 표출해 '금오신화'를 남겼다.
수록한 작품 다섯 편 가운데 첫째 것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보자. 양생(梁生)이라는 젊은이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남원에 있는 절 만복사 동쪽 방에서 홀로 거처하면서 외로움을 하소연하는 시를 지어 읊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사찰을 무대로 하고, 승려가 아닌 속인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거리를 두고서, 자기 자신이 느낀 외로움을 투영했다.
김시습은 상상한 바를 작품화하는 데 그쳤지만, 양생은 찾아온 여인이 있어 간절하게 바라던 아름다운 인연을 이루었다. 찾아온 여인은 원통하게 죽어 멀리 떠나가지 못하고 있는 원귀였다.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어서 파탄으로 끝나야 했다. 다른 작품에서도 원귀가 된 여인과 사랑을 나누고 간절한 소망을 꿈속에서나 이루었다고 하면서 꺾이지 않을 수 없는 희망을 역설적으로 강조했다. 자아와 세계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관계를 심각하게 그렸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에서는 경주에 사는 박생(朴生)이라는 선비가 꿈에 저승에 가서 염왕(閻王)을 만난 사건을 다루었다. 염왕은 박생이 "정직하고 항거하는 뜻이 있어 세상에 살면서 굽히지 않는" 줄 알고 만나고 싶었다고 하고, 박생은 염왕에게 제왕이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를 역설했다. 염왕이 박생의 지론에 동조해 인간을 심판하는 저승을 부정하고 제왕의 횡포를 함께 비판하고, 박생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었다.
"나라를 지닌 자가 폭력으로 백성을 위협해서는 안 됩니다. 백성이 두려워 복종하는 것 같지만 마음속으로는 반역심을 품어, 날이 쌓이고 달이 이르면 얼음이 어는 것과 같은 화가 일어납니다. 덕이 없는 자가 힘으로 왕위에 오르지 말아야 합니다."
박생은 염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실의 군주를 상대로 해서는 펼 수 없는 주장을 염왕에게 토로했다고 하고 말 것은 아니다. 꿈속에서 뜻을 이루었다고 하는 상투적인 설정을 기발하게 이용해 엄청난 발언을 했다. 염왕이 군주의 횡포를 비판하는 데 동조하고 저승의 심판을 스스로 부정했다는 사건을 만들어내, 세속과 초세속 양쪽의 권위를 모두 거부했다.
김시습은 승려가 되어 세속을 떠났으므로 외롭지만 자유로울 수 있었다. 예사 승려로 살아가지 않고 불교의 교리에 매이지 않아, 염왕이 저승에서 심판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올바른 도리가 무엇인지 말했다. 방외인이 온갖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굽히지 않는 것은 진실 추구를 삶의 보람으로 삼기 때문임을 분명하게 알렸다.
김시습의 시대에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오늘날은 각자 자기 좋은 대로 살아도 되는 자유를 누린다. 그런데 김시습이 떨치고 나선 구속을 일제히 받아들인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처신하느라고 자아를 상실한다. 물질의 지배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거처하는 주택의 시세로 삶의 질을 평가하기까지 한다.
조동일 계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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