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월 칠석 날은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는 사랑의 날이다. 그러나 1592년 그해 칠석날은 피비린내를 풍긴 '지옥의 날'을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당포에서 저녁 준비를 하고있을 때 왜선 70여 척이 한산도 앞바다 견내량에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임진왜란, 소위 '7년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역전시킨 '한산대첩'의 서막이 올랐다.
이순신은 즉시 조정에 狀啓(장계:임금에게 글로 보고하는 것)를 올렸다.
"초 8일 아침 적선이 머물고 있는 곳에 나가보니 큰 배 36척, 중간 배 24척, 작은 배 12척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견내량의 지형이 협착하고 또 암초가 많아 우리 판옥선끼리 부딪쳐 싸움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敵(적)은 형세가 불리할 경우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버릴 수 있어 한산도 큰바다로 끌어내어 온통 잡아버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해전은 그의 장계 그대로 진행됐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鶴翼陣(학익진)이 빛을 발한 순간이다.
한산대첩을 요약하면 당시 적의 배는 73척으로 아군 58척보다 15척 많았지만 병력은 압도적이었다. 줄잡아 5만 5천, 이에 비해 아군 병력은 1만여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적의 배 59척이 침몰하고 병력 약 4만1천 명이 수장됐다.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그 중 살아남은 적들은 한산도로 기어올라 솔잎을 따먹고 연명했다고 한다. 13일 후 200여 명이 뗏목을 만들어 간신히 탈출해 목숨을 구했다고 하니 왜군의 기세는 여기서 완전히 꺾였다.
이로부터 약 300년 후인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발틱 함대를 궤멸시킨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나는 이순신 장군에 비하면 일개 하사관에 불과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그는 근 20년간 이순신의 해전을 연구했다. 그는 여러 번 남해안을 답사한 후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을 분석해냈다. 도고 제독은 여기서 丁(정)자 전법을 개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후 영국과 미 해군이 이 전법을 'T자 전법'으로 발전시켰다.
내일이 칠월 칠석이다. 때맞춰 통영에서는 한산대첩 축제를 벌이고 학익진을 재연하는 행사도 가졌다고 하니 다시 한번 역사적 감회에 젖는다. 우리에게 칠월 칠석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윤주태 중부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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