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살아가는 이야기)나이 오십에 올리는 마음의 세배

조용한 산골동네 음지마을과 양지마을이 서로 쳐다보면서 며칠 전부터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어머니의 마음과 손길은 바쁘다.

난 아버지 따라 뒷산에 올라 반질반질 토끼가 지난 길을 따라 가는 철사로 둥글게 만들어 소나무에 매어 둔 덫을 찾아다니며 두어 마리의 산토끼를 잡아 내려오는 길에 운 좋게 덤으로 논두렁에서 약 먹은 꿩도 한 마리 줍는다. 뒤뜰에 구덩이 파서 겨울 내내 묻어 놓았던 배추랑 무도 꺼내 솥뚜껑 뒤집어 걸어 놓고 들기름으로 배추전도 부치고 무는 돔방 돔방 썰고 생강은 절구에 빻고 고들고들 찹쌀 밥 지어 고춧가루와 당원을 넣어 따뜻할 때 질금 물에 모든 재료를 섞어 하루 정도 삭히어 찬 곳에 두면 새콤 달콤 매콤한 안동 특유의 식혜가 겨울 내내 변질 없이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처음엔 못 먹겠다던 사위들이지만 지금은 술 한잔과 꼭 먹고 싶다며 안동식혜를 찾아 해마다 식혜를 만드신다.

섣달 그믐날, 큰집 오빠 내외가 담근 동동주와 안주 한 상을 들고 와 묵은세배를 하고 나면 새해 아침 일찍 떡국을 끓여 마당에 멍석을 깔고 문밖 세배를 올린다. 어머니는 어제의 답례로 그저께 만들어 놓은 살얼음이 동동 뜨는 식혜에 땅콩 한 줌 듬뿍 넣어서 메밀묵이랑 차려오시고 덕담이 끝나시면 남동생을 깨워 큰집이랑 옆집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새해 아침 여자가 일찍 오면 일 년 내내 재수가 없다는 속설이 있기에 그날만큼은 어린아이라도 남자가 가면 한 상 차려 대접해 주었다.

세배와 차례가 끝나고 흰 떡국을 배불리 먹고 나면 동네 개구쟁이 모두 집 앞 얼음판에 손수 만든 앉은뱅이 썰매와 팽이를 들고 지칠 줄 모르고 놀다 보면 엉덩이는 축축하고 양말은 물속에 빠져 모닥불에 언 발을 녹이다 설빔으로 사준 빨간 나이롱 양말은 돌이킬 수 없도록 구멍이 뻥 뚫려 혼이 났다.

요즘 아이들은 설날이 되면 누가 세뱃돈 얼마나 받는지 관심뿐이지만 어렵던 시절 세뱃돈이 무엇인지 모르고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빨간 내복 한 벌 얻어 입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나이롱 양말 대신 멀쩡한 양말을 유행 지났다고 아무리 버려봐도 그때 꾸중하시던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한 상 그득 차려 놓아도 사진 속에서 무언의 대답으로 웃고 계실 뿐이다.

눈꽃이 지고 뾰족한 새싹이 움틀 무렵 잡초만 무성하다는 고향집 마당도 구석구석 더듬어 보고 지금은 하나 둘 먼 곳으로 가시고 얼마 안 계시는 일가 친척 분들 "아제 오랜만이시더 잘 있었능교? 아지메는 하나도 안 늙었니껴" 정겨운 고향 사투리도 실컷 하고 홀로 외로이 고향 지키시는 아버지 산소에 뽀얀 쌀 떡국에 이제껏 미뤘던 마음의 세배를 오십이 되어서야 두 손 올려 한없이 드리고 싶다.

이숙흠(대구 수성구 만촌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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