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얼음 호수(김명인)

가장자리부터 녹이고 있는

얼어붙은 호수의 중심에 그가 서 있다

어떤 사랑은 제 안의 번개로

저의 길 금이 가도록 쩍쩍 밟는 것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빙판 위로 내디딘 발걸음 돌이킬 수 없다

깨진 거울 조각조각 주워 들고

이리저리 꿰맞추어보아도

거기 새겼던 모습 떠오르지 않아 더듬거리지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한때의 파문

어느새 중심을 녹여버렸나

나는 한순간도 저 얼음 호수에서

시선 비끼지 않았는데

산책길에 늘 끼고 도는 저수지가 며칠 한파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손세실리아 시인은 꽝꽝 얼어붙은 얼음 호수를 송두리째 자신을 염해버린 완벽한 봉(封)함이라 했지요.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호수를 통해 이렇듯 사랑을 노래할 수도 있군요. 역설입니다. 사랑은 어쩌면 가장자리부터 살금살금 녹는 것. 아니 저 얼음 호수처럼 저의 가장자리부터 스스로 '녹이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아직 얼어붙은 호수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어떤 사랑은 제 안의 번개로/ 저의 길 금이 가도록 쩍쩍 밟는 것"처럼 위태로운 것이기도 하지만,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빙판 위로 내디딘 발걸음 돌이킬 수 없"듯이 운명적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추억이란, "깨진 거울 조각조각 주워 들고/ 이리저리 꿰맞추어보"기와 같아 우리는 잠시 "더듬거리"게 되곤 합니다. 하지만 "가슴 두근거리게 하던 한때의 파문"은 부지불식간에 호수(혹은 그)의 중심을 녹여버립니다. 사랑의 속성이자 위력입니다.

날씨가 풀리면 저수지의 저 요지부동 얼음도 어느새 녹아버리지 않겠습니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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