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조선 정조 임금이 신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가 발굴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책은 그때 공개된 편지자료와 이전에 알려진 편지 등 350통을 바탕으로 정조의 고뇌와 통치 기술을 분석한 책이다. 정조가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 현직 최고 관리들에게 비밀스럽게 보낸 편지를 통해 독자들은 그의 정치 스타일, 인간적인 면모, 막후 정치 등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비밀을 지키라'고 편지에 여러 번 당부했다.
'내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경은 함부로 이야기했다. 나는 이처럼 경을 격의 없이 대하건만 경은 갈수록 입을 조심하지 않는다. 경을 대할 때 나 역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다. 경은 이제 늙어 머리가 세었다. (그러나) 매번 입조심하라 해도 탈이 생기니,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라 하겠다. 너무 답답하다.'
정조는 편지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고르는데도 심혈을 기울였고, 심환지에게도 사람을 잘 고르라고 자주 당부했다. 또 편지를 읽은 다음에는 찢어버리라고 주문했지만 심환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찢어버리지 않고 철해서 보관했다.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정조어찰첩'을 분석해 보면 정치현안 논의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인사문제 논의, 상소문 논의, 정계 여론동향 탐문, 개인사, 부정부패 척결, 심환지 개인의 진퇴 문제, 대신들의 능력 평가, 정조의 성격, 정조의 건강 등 순으로 나타난다.
정조는 신하들이 당파의 의리를 고수하는 것을 인정했으며 제 목소리를 강하게 내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대들은 모두 나약한 사람들이다. 마땅히 준엄한 상소문을 지어 시사를 통렬하게 따져서 험난함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려면 관모를 벗고 떠나가야지, 어째서 용렬하고 못나게 대오를 뒤따르기만 하는가.'
'경은 점점 세상의 진부한 형식에 오염돼 모서리도 없고 까칠함도 없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지 못한다. 이 또한 사류(士類)의 기풍이라 할 것인가.'
정조는 편지쓰기를 좋아했다. 일이 너무 많아 편지를 자주 쓸 수 없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심부름꾼을 기다리게 해놓고 급하게 쓰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다혈질적이고 흥분을 잘하며, 조급한 성격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편지에서 '나는 태양증이 있어 부딪히면 바로 폭발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태양증 기질을 고칠 수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는 떠오른 생각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황인기와 김인수가 정말 어떤 놈들이기에 감히 주둥아리를 놀리는가.' 19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산문가인 김매순에 대해서는 '입에서 아직 젖비린내가 나는 놈이 감히 선현을 모욕하여 붓 끝에 올리기까지 했다'며 개탄했다.
흔히 우리는 심환지 일당이 정조를 독살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과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에서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 점을 정면 반박한다. 정조가 오래전부터 병이 깊었음을 알려주는 편지와 사망 13일 전에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통을 형용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내용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정조는 심환지를 무척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1799년 10월 1일 보낸 편지에서는 정조가 심환지의 아들 심능종을 과거시험에 붙여주지 못해 아쉬워하며 심환지를 위로하는 내용이 쓰여 있다.
'300명 안에만 들도록 답안을 냈으면 경이 심하게 늙기 전에 자식이 과거에 합격하는 경사를 보도록 조치하려 했으나 그리 되지 못했다.'
정조는 다혈질이었으나 인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1799년 초 전국에 전염병으로 12만명이 죽었을 때 김종수와 채제공도 한꺼번에 죽었다. 정조는 채제공과 정적인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내 '생전에 한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눈 사람이 죽었는데 조문하지 않는다면 결코 인정이 아니다'고 썼다. 또 김종수의 영구를 옮길 때 전염병을 염려해 와 보는 사람이 없자 '선비라는 것들의 꼴이 어째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나도 모르게 팔뚝을 걷어붙이고 분개한다'고 썼다.
책은 정조가 자연사했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정조의 어찰을 비롯해 심환지 가문에서 전해오는 문집, 역사서 등을 면밀히 검토해 정조 시대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지은이 안대회는 충남 청양 출생으로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로 있다. 한문학을 연구해 많은 책을 썼다. 147쪽, 8천800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댓글 많은 뉴스
문재인 "정치탄압"…뇌물죄 수사검사 공수처에 고발
[전문] 한덕수, 대선 출마 "임기 3년으로 단축…개헌 완료 후 퇴임"
대법, 이재명 '선거법 위반' 파기환송…"골프발언, 허위사실공표"
세 번째 대권 도전마저…홍준표 정계 은퇴 선언, 향후 행보는?
野, '피고인 대통령 당선 시 재판 중지' 법 개정 추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