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일제가 현대 조선 개신" 해방후에도 망발…친일파 박중양

[國恥百年] ⑤ 용서받지 못할 매국노들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것 외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 일기 형식으로 쓴 박중양의 회고록의 한 부분이다. 그는 뼛속까지 친일파였다.

박중양은 1874년 경기도 양주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뒤 러일전쟁 중에 귀국해 일본군 통역관이 됐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평안도 관찰사와 대구 군수로 근무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양자가 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박중양은 1904년 이후 대구에서 살아 대구의 대표적인 친일파가 됐다. 그의 행동은 비상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4월 6일 대구에서 '자제단(自制團) 발기인회'를 조직해 단장이 되었다.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 활동은 소요(3·1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이다. 단원들은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곧바로 경찰관헌에 보고한다는 서약까지 했다. 안동, 성주, 군위, 김천 등지에도 조직됐고, 3·1운동 탄압 공로로 박중양은 그해 9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조선총독부가 조선통치 25주년을 기념해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박중양은 "이토 이하 총독부 대관으로부터 역량·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급에서는 박중양"이라고 했다. 1945년 4월에는 일본제국의회 귀족원의 조선인 7명 중 한명으로 선임됐다. 조선 출신으로는 1945년 4월 이전에 선임된 3명을 포함해 모두 10명뿐일 정도로 특별한 예우를 받았다.

1906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시절 박중양은 대구 읍성을 파괴했다. 읍성 바깥에서 활동하던 일본 상인을 위해서였다. 대구객사, 공자묘 등을 헐거나 팔았고, 공공건물에 있던 협성학교까지 내쫓았다. 이렇게 무소불위의 행패를 부린 그가 대구 오봉산에 새긴 '일소대'(一笑臺)라는 기념비는 몇 년 전까지도 당당하게 대구를 굽어보았다. 어느 신문 주간지는 박중양을 대구 근대화의 선각자로 꼽기도 했으니 이 세월이 어느 세월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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