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엄원태의 시와 함께]파타고니아의 양(마종기)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었어.

내가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해도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것만은 믿어보라고 했지?

그래도 굶주린 콘도르는 칼바람같이

살이 있는 양들의 눈을 빼먹고, 나는

장님이 된 양을 통째로 구워 며칠째 먹었다.

어금니 두 개뿐, 양들은 아예 윗니가 없다.

열 살이 넘으면 아랫니마저 차츰 닳아 없어지고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은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줄까?

짐승 타는 냄새로 추운 벌판은 침묵보다 살벌해지고

올려다볼 별 하나 없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다.

남미의 남쪽 변경에서 만난 양들은 계속 죽기만 해서

나는 아직도 숨겨온 내 이야기를 시작하지 못했다.

굳이 먼 이국의 변경이 아니더라도, "거친 들판에 흐린 하늘 몇 개만 떠 있"긴 여기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도 삶은 온통 불모에 가까워서 "올려다볼 별 하나 없이 아픈 상처만 덧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어야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사랑을 다만 느낄 수 없을 뿐일지도 모르니까요.

칼바람 같은 콘도르에게 눈을 빼먹혀, 장님이 된 양을 통째로 구워 며칠째 드시며 지내신다는 저간의 암담한 사정을 짐작해 봅니다. 가시보다 드센 파타고니아 들풀을 먹을 수 없어, 결국 잇몸으로 피 흘리다 먹기를 포기하고 죽는 양들 얘기도 우리들 삶과 다를 바 없어 인상 깊습니다.

거듭 말씀 드립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라고 믿노라면 혹시 파타고니아의 하늘도 하루쯤 환한 몸을 열어주지 않을는지요. 그때엔, 선생님 가슴 속 오래 숨겨온 얘기를 비로소 시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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