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훈(가명)이는 스물여섯살이다. 몸은 약간 왜소하지만 그래도 청년 티가 난다. 수술을 받고 퇴원한 후 엄마와 같이 외래에 왔다. 영훈이는 나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아무리 엄마가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아저씨라고만 한다. 아저씨라는 말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한다. '아저찌'라고 한다.
영훈이는 돌도 지나지 않아 병원에 왔다. 뇌실(腦室)이 커진 수두증(水頭症)이라는 병이었다. 피부 밑에 관을 넣어 머리 안 뇌실과 배 안의 복강(腹腔)을 서로 연결하는 수술을 받았다. 몇 년은 잘 지냈다. 그러다가 관이 막혀 여러 번 재수술을 받았다.
얼마 전 영훈이가 또 응급실에 실려 왔다. 복막염으로 관의 작동이 안 돼 혼수상태로 왔다. 일단 복강 안에 들어 있는 관을 밖으로 빼내서 밀폐된 백(bag) 안에 넣었다. 뇌척수 액이 빠져나오자 의식이 돌아왔다. 항생제를 써서 복막염도 좋아졌다. 밖에 빼내 놓았던 관을 다시 배 안으로 넣어줘야 했다.
가슴 부위에서 옛날 관을 자르고 새것으로 바꾼 후 피부 밑으로 터널을 만들어 배 쪽에서 밖으로 빼냈다. 일반외과 교수에게 그 관 끝 부분을 내시경을 사용해 복강 안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일반외과 교수는 내시경으로 복강 안을 이리저리 조사한 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복강 안 모든 곳이 서로 유착돼 관을 넣을 공간이 없다고 했다.
난감했다. 어디에 관을 넣는단 말인가? 관의 기능이 생명줄인데. 문득 간(肝)과 횡격막이 접한 공간이 생각났다. 이 공간은 유착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배를 열고 관을 그 공간에 위치시킨 후 복벽에 고정시켰다. 수술 후 영훈이는 별다른 문제없이 퇴원했다. 그리고 지금 외래에 온 것이다.
같이 온 엄마가 이야기했다. 꿈이 하나 있다고. 자기가 직장에 일하러 갈 때 영훈이를 집안에 가둬놓지 않아도 되고,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만큼만 영훈이가 회복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는 약을 처방하자 비틀거리는 영훈이의 손을 꼭 잡고 꾸벅 인사를 하며 외래 진찰실을 나갔다.
사람들은 보통 꿈을 꾼다. 현실보다 조금은 큰 꿈을 꾸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영훈이 엄마는 간과 횡격막이 붙어있는 그 조그만 공간의 크기만 한 꿈만 꾼다. 그 꿈만이라도 지속되기를 빌며 살아간다. 그 공간이 폐쇄되면 영훈이의 뇌척수 액이 흐르는 관을 들여 놓을 장소가 없어진다. 그 장소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훈이의 생명까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영훈이 엄마의 그 조그만 꿈, 그것까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꿈이 지속되기를 기원하는 듯 그렇게 영훈이 손을 꼭 쥐고 진찰실에서 걸어 나간 것 같다.
임만빈<계명대 동산병원 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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