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모(55)씨는 며칠 전 아찔한 경험을 했다. 3일 오후 1시 55분쯤 대구 수성구 범물1동 주민센터에서 H사의 고급 승용차를 주차하려는 찰나였다. "자동변속기어를 N으로 놓고 브레이크를 밟는 순간 차가 오토바이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앞으로 돌진했어요." 다행히 1m 앞 담벼락에 충돌해 큰 화는 면했다. 이 사고로 박씨는 무릎과 가슴 등에 심한 멍이 들었고 조수석에 타고 있던 이웃주민도 타박상을 입었다. 차량 앞범퍼도 깨졌다.
그러나 차량 제조사 측은 "차량 결함이 전혀 없다"며 운전자 과실로 몰아붙였다. 박씨는 "20년 넘게 운전했는데 브레이크와 액셀레이터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겠느냐"며 "지난해에도, 3주 전에도 제멋대로 차가 질주해 사고가 났다.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급발진 사고를 당했는데도 이상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억울해 했다.
차량 급발진 사고 보상이 하늘에 별 따기다. 한국의 급발진 사고는 목격자나 블랙박스 등 차량 급발진을 규명할 완벽한 증거가 없다면 단순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통례다. 비록 지난해 9월 자동차 급발진 사고에 대한 차량 결함 여부를 판매업체가 입증해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으나 현실에선 여전히 운전자가 급발진 여부를 증명해야 한다. 급발진 사고 차량 제조사 측은 '급발진 사고' 대신 '급발진이라 주장하는 사고'란 용어를 쓸 정도다.
급발진 사고 차량 운전자들은 소송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소송 비용과 기간도 문제이지만 소송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한 탓도 있다. 한국소비자원에 들어오는 급발진 상담건수는 연간 100여건 이상이나 2007년(119건)을 기점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8년 101건에 이어 지난해엔 60여건에 그쳤다. 소송해 봐야 돈과 시간만 낭비할 뿐 승산 없는 싸움이란 것이다.
숱한 소송 가운데 급발진 책임을 제조사에 돌린 판결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 급발진으로 추정되는 사고로 시어머니를 잃은 탤런트 김수미씨도 자동차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대법원에서 패소하는 등 소송 당사자들은 제조사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대법관이 탄 차량이 급발진을 일으켜 소동을 빚기도 했다. 2005년 3월 서울대 초청 특강에 참석하려던 김영란 대법관의 차량이 후진하다 급발진해 뒤편에 주차돼 있는 차량과 인도 턱을 연이어 들이받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충격으로 김 대법관은 머리에 타박상을 입고 응급차로 긴급 이송됐다. 당시 운전사 김모(55)씨는 "건물 앞에 승용차를 세운 뒤 학교 관계자가 뒷문을 여는 순간 차가 뒤로 밀리다 순간적으로 급발진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가속페달 차량에 대한 일본 도요타의 대량리콜 사태를 들며 제조사 측의 엄중한 도덕적 잣대를 요구하고 있다. 차량 결함은 절대 없다며 버티기보다는 좀더 세밀한 기술 분석을 통해 급발진 추정 사고 차량에 대해 정밀 진단을 내리고 차량의 완성도를 높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박병일 신성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최근 대량리콜 사태를 빚고 있는 도요타의 경우도 급발진 차량 결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대책을 강구했다면 지금의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동차에 첨단 전자장치가 갈수록 많이 장착돼 오작동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만큼 제조사들이 급발진 사건을 무조건 피할 것이 아니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소비자에게 알리고 안전장치를 추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박 교수는 1999년 차량 급발진이 엔진제어장치의 오작동 때문임을 세계 최초로 밝혀 정부로부터 자동차 분야 명장에 뽑혔다.
임상준기자 news@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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