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영어 공용화

흔히들 문자는 사상 표현의 도구라고 하지만 그 명제만으로는 문자의 역할을 전부 설명하기 힘들다. 문자가 오랜 시간 일정한 틀에 맞춰 기호로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진화해 온 것만 봐도 문화적'정치적 기능과 역사적 의미까지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는 권력자나 지식인이 의도한, 문자를 매개로 한 소통이 문화적'정치적 일통(一統)을 강제하고 역사성까지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문자를 더 이상 단순한 도구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한자의 경우 그 글꼴이 디자인된 것은 은나라 때이지만 청동기에 한자를 새긴 소위 '금문'(金文)으로 하나의 문화적 토대로 삼은 것은 주나라 때다. 춘추전국시대 당시 사투리의 분화로 의사소통이 불분명해지자 청동기 문서의 불변성을 내세워 맹약과 배반을 통제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중문학자 김경일 교수는 '한자의 역사를 따라 걷다'에서 "말의 갈래가 어떻든 하나의 글꼴로 사람들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권력자 앞에 무릎을 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문자를 통한 문화의 통일"이라고 지적했다. 진시황이 중원 통일을 계기로 한자의 통일을 꾀한 것이나 모택동 시대 때 '간체자 표기 개혁'을 통해 중국을 한 덩어리로 묶으려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저께 포스텍이 3월 신학기부터 영어 공용화를 전면 시행, 3년 내 영어 공용화 캠퍼스를 완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강의와 논문은 물론 회의'행정문서까지 영어 사용을 의무화하는 등 캠퍼스 내 영어 사용을 원칙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성급한 공용화가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며 비판적으로 보고 있지만 우수한 인재를 모으고 대학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라는 게 대학 측의 시각이다.

신해혁명 직후 한자로 글을 쓴 루쉰(魯迅)도 '한자불멸, 중국필망'(漢字不滅, 中國必亡)을 외치며 한자 폐지와 로마자 표기를 주장했다. 문자와 말을 놓고 빚어지는 이런 충돌에서 우리가 살펴야 할 부분은 과연 무엇일까. 분열과 분화를 막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 기능했던 한자, 넓은 세계와의 소통과 고립을 피하기 위한 영어 공용화라는 패러다임의 차이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정체성을 내세운 찬반의 이분법적 가치가 아니라 경쟁과 소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방편을 찾는 일이다. 그래서 문자와 말의 기저에 깔린 의미와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서종철 논설위원 kyo425@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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