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어느 어머니의 통곡

서울발 열차에 몸을 실었다. 최면에 걸린 듯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울음소리가 들렸다. 꿈속인가 했다. 열차의 철커덩거리는 바퀴 소린가 했다. 나른한 정신을 수습하는 동안 울음소리는 더 명확해졌다. 젊은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갔는데 야가 문을 안 열어주더라."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가족 중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중 설움이 복받친 모양이다. 부끄러움도 잊고 전화기에 대고 꺽꺽 우셨다.

자식을 찾아갔다 만나지 못하고 돌아선 할머니, 노구(老軀)를 이끌고 열차에 오른 순간 꾹꾹 눌러왔던 설움이 폭발해 버린 듯하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했다. 젊거나 늙거나 아버지이거나 어머니인, 혹은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인, 객차 안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비슷한 사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설마 했다. 개연성이 있는 일이란 생각은 했지만 뿌리는 없고 소문만 무성한 세태풍자려니, 제멋대로 나부끼고 펄럭대다 바람과 함께 잦아드는 우스갯소리려니 했다. 그랬으면 싶었다.

내게도 부모님이 계시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엄마는 두 해 전에 돌아가셨다. 이제 며칠 있으면 엄마의 기일이 돌아온다. 여전히 나는 엄마의 집에 가는 일이 두렵다. 마당에 서면 마당에서, 방에 들어가면 방에서 장독대에 가면 장독대에서 엄마를 만난다.

"엄마!"

부르면 집안 어디에선가 "우리 막내구나"하고 웃으며 나오실 것 같다.

이제 내 마음속에만 사시는 엄마, 불러도 대답이 없다. 부를 수없는 엄마를 가진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많이, 더 자주 불러보고 불러드릴 걸 그랬다. 졸졸 따라 다니며 엄마, 엄마, 엄마! 어린아이처럼 칭얼대볼 걸 그랬다. "야가 와 이카노" 하면서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을 텐데, 두 볼 가득 행복을 탱탱하게 채워 드릴 걸 그랬다.

대다수의 부모는 좋은 건 뭐든 자식에게 퍼주고 싶어 한다. 퍼주고 싶지만 형편상 퍼줄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퍼주든 퍼주지 못하든 사랑의 무게는 같다. 그리움의 무게도 같다. 아마도 노모의 자식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통보 없이 찾아가 빈집이었을 수도 있다.

사정이야 어떻든 노모의 가슴에 회오리바람이 지나갔다. 부러지고 뽑혀 허망해진 늙은 어미의 가슴을 복구해 줄 사람은 자식밖에 없다. 그저 '엄마'라고 한번만 불러주면 된다.

임수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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